▲ 박근용 칼럼니스트

서울대 교수를 지낸 고(故)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인연(因緣)>에는 “보기에 따라서는”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선생의 친구는 영어를 잘했기에 광복이후 미군정의 적산(敵産)관리처에서 일을 했다. 적산관리처에서 적산불하와 관련된 일은 광복 이후 최고의 특권을 누리며 마음만 먹는다면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친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셋방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동료들 하는 짓에 염증을 느끼고 2년 만에 그 일을 그만 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최고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적산불하란 과연 무엇 이었을까?

적산불하(귀속재산불하)란 광복이후 일본이 가져가지 못한 산업시설이나 가옥 등 부동산과 차량 등의 재산을 미군정이 압수해 귀속시킨 것을 한국의 기업이나 국민에게 불하한 것을 말한다. 이때 불하된 기업을 적산기업이라 한다. 적산불하 대상이 되었던 일본인 소유의 공장 등은 6881개, 자본금 기준으로 한국 전법인의 약 91%에 달하는 등 적산불하 대상이 됐던 기업의 규모는 상당했다고 한다(자료참조 : 매일경제 1995년 1월 25일 재계50년 특집). 적산기업은 해당 기업의 주주 또는 5년 이상 근속자 등 기업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불하됐다. 적산기업은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매각됐고, 매수대금도 5~15년의 장기분할납부 하면 매수계약금 10%만으로 불하받을 수 있었다. 또한 광복이후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산기업을 불하는 곧 특혜이자 성공의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부 때 불하된 적산공장은 약 1500~2500개에 이르렀고, 현재 약50개 정도의 기업이 존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업 중에는 대기업을 성장한 사례도 많다.

선경직물공장 공무과 견습기사에서 출발한 고(故) 최종건이 불하받은 공장은 선경(SK)그룹의 모태가 됐으며, 조선화약공판에서 다이너마이트생산계장으로 일하던 고(故) 김종희가 불하받은 화약 공판은 한화그룹의 모태가 됐다. 또한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고(故) 이양구에게 불하돼 동양그룹의 모태가 됐고,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고(故) 이병철에게 불하돼 신세계백화점이 됐다. 이 외에 소화기린 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고(故) 박두병에게 불하돼 OB맥주가 되어 두산그룹의 모태가 됐고,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이었던 고(故) 민덕기에게 불하돼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가 되는 등 현대, 삼성, SK, 한화, 두산, 동양, 쌍용, 동국제강, 해태, 벽산, 대한전선, 조선맥주, 국제그룹 등과 같은 대기업들은 적산기업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적산기업들의 불하는 일본이 가져가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했지만 일본이 가져가지 못한 것의 상당 부분은 일본의 수탈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국민의 재산이었다. 또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많은 국민의 인내와 노력이 기반이 되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업들은 사회로부터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 동양그룹의 법정관리,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배임, SK그룹 최태원 회장 형제의 배임과 횡령 등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우연일지 모르나 동양그룹, 한화그룹, SK그룹 등은 모두 그룹의 모태가 적산불하를 받은 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 그룹 모두 그 모태가 일본이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과 노력, 피와 땀을 수탈해 만든 기업을 불하받은 적산기업이었고, 산업화 시기에는 우리나라 근대 산업화의 기반으로 인식돼 많은 국민의 희생과 인내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어느 기업들보다도 사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기업들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다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돼 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회에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공헌함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사회에 피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먼저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업들이 불미스런 일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오히려 앞장서서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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