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이정수의 가족과 함께 떠나는 감성여행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아는가?/ 구름이 넘나들며 백록이 목을 축이던/ 한라에 서서/ 멀리 출렁이는 바다가/ 바람을 해맑은 하늘에 마구 뿌려 대는/ 비취빛 사랑은 누구의 숨결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피어있는 하얀 눈꽃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대와 손을 꼭 잡고/ 순백의 눈꽃 세상에 푸우욱 빠져/ 차가운 바람도, 힘에 겨운 무게도/ 하얀 사랑으로 이겨내는 푸른 나무들처럼/ 다시 태어나/ 겨울 한라산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되어도 좋고/ 따스한 햇살에 녹아떨어지는 한 방울 물방울이어도 좋다/ 그대 눈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하얀 나비라도 좋고/ 끝도 없이 부딪치는 파도에서 시작되어/ 겨울 한라산 백록을 넘나드는 구름이라도 좋다.” (오석만 시 ‘겨울 한라산’)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곳

제주도는 여느 때 찾아가도 신비스럽다. 겨울 한라산은 더 그렇다. 산 위는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설국’을 이루고, 낮은 곳에선 작은 풀들이 엄동설한에도 싹을 틔운다. 산에 오르면 겨울이고, 내려오면 벌써 봄이 느껴진다. 이맘때 한라산에 가면 단지 ‘아름답다’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설경을 만날 수 있다. 눈이 수북이 쌓인 등산길을 걸으면 한라산이 우리나라 유일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를 쉽사리 알 것만 같다. 한라산에는 어리목·영실·돈내코·성판악·관음사 등 5개 등산 코스가 있다. 코스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 설국을 연출한 한라산. 사진=뉴시스

이 가운데 영실코스는 가장 짧은 거리인 데다 길이 완만해 가족단위 등산객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해발 1280m 영실휴게소에서 시작하면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3.7㎞. 등산로에 눈이 수북이 쌓인다 해도 손을 잡고 걷기에는 무리가 없다. 쌓인 눈을 헤치다 넘어져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눈 위에 넘어지면 웃음부터 나온다. 동행하는 사랑하는 이들이 일으켜 세워주면 그만이다.

신들이 모여 사는 곳…영실

제주의 지명은 아직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신비감을 더하고 정감이 느껴진다. 영실(靈室)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우리말로 ‘신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발길 닿는 곳곳마다 ‘하로산 또(한라산 신)’가 머무는 듯한 신비감이 휘감아 돈다. 눈을 밟는 ‘뽀드득뽀드득’ 하는 소리가 못된 신이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뒤돌아보기가 조금은 무서워진다. 한라산에 오르기 전에 못된 짓을 하지나 않았나를 생각하다 헛웃음을 쳐본다.

눈을 헤치고 1시간가량 걸으니 거대한 병풍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한라산 신들이 왜 여기에 머무는지 알 것만 같다. 기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코발트빛 하늘과 검은 돌, 그리고 순백의 눈덩이가 어울린 병풍바위 주변은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절경이다. 눈 내린 영실기암은 마치 히말라야 같은 고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검고 날카로운 톱니를 드러낸 것이 경이로운 풍광이다. 수많은 눈보라가 지나간 사이 절벽 위에는 눈으로 처마가 생겨난다. 내린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니 ‘눈 처마’는 점점 길어진다. 설경을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 절벽 끝으로 다가가면 날카로운 얼음이 떨어진다. 겨울산행은 자칫하면 넘어지고 얼음조각에 다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욕심과 만용은 금물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봉우리 뒤로 오백나한이 줄지어 서있다.

영실기암 앞 기념촬영은 필수

이곳에 서니 영실기암(靈室奇岩)이 한라산을 대표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영주십이경 중 하나로 춘화, 녹음, 단풍, 설경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과 울창한 수림이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라산 정상의 남서쪽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하다 하여 이곳을 영실이라 부른다고 했다.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와 우뚝우뚝 솟아있는 바위들이 수만 군사를 거느린 장군 같다. 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함께한다. 제주도 곳곳의 전설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에서 빠지면 섭섭한 일. 할망의 500명이나 되는 자식처럼 보인다고도, 그 모습이 나한의 모습처럼 보인다고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멋진 풍광 앞에선 발을 멈추고 물 한모금 마시고 기념사진도 찍어야 한다. 감탄사를 연발하느라 쉽사리 산행을 계속하기도 어려운 곳이다. 다시 언덕을 오르려다 뒤를 돌아보면 또 한번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 서쪽 바다 방향으로 오름과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구름이 있으면 있는 대로 하늘과 바다의 만남이 황홀하다.

겨울 등산객 위한 배려도

이어 평지나 다름없는 능선길을 따라가면 숲길이 기다린다. 거리는 짧지만 등산로 곳곳이 빙판이다. 구상나무 군락지대를 지나자 온몸을 완전히 드러낸 고사목이 등산로 주변을 메우고 있다. 눈에 덮여 길을 찾기 어렵다 싶은 곳마다 빨간 줄을 매달아 놨다. 등산객을 위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등산로를 알려주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윗세오름 대피소가 기다린다. 수북한 눈길을 걷느라 지친 다리를 쉬어가는 곳이다. 대피소 매점에는 매년 겨울 설원을 즐기려는 사람만큼이나 사발면 용기가 수북하다. 사발면은 물이 귀하고 뒤처리에 신경 써야 하는 청정 국립공원인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의 국물요리인 셈이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라면 한 그릇씩을 받아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먹는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호호 불면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는 모습이 정답고 따스하다. 냄새 때문인지 까마귀들은 쉴 새 없이 주위를 맴돌고, 이따금 어리목과 영실 코스 시작점의 버스 시간을 알려주는 산장지기의 목소리가 정겹다.

▲ 눈으로 2m가량 눈이 쌓인 한라산을 찾은 관광객들. 사진=뉴시스

이제 산을 내려와야 할 시간, 올라온 시간만큼의 나머지 산행이 기다리고 있다. 한라산 1700m 고지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산 평원인 선작지왓이다. 제주도 말로 ‘선’은 서있다, ‘지’는 돌, ‘왓’은 밭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작지왓 평원은 ‘작은 돌들이 서 있는 밭, 들판’을 뜻하는 셈이다. 하지만 겨울철이 되면 돌은 보이지 않고 하얀 눈과 세찬 바람 뿐이다. 한라산의 바람은 살을 에는 모진 삭풍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맑은 바람이다.

소나무 군락의 눈숲 절경

하산길은 어리목 코스를 택했다.  시시각각 다채로운 눈 풍광이 있는 영실코스와 달리 어리목 코스는 조금은 단조롭다. 오름이 보이는 언덕과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나눌 수 있다. 평화롭게 마음이 정화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어리목코스는 북쪽을 향해 있는 만큼 눈꽃의 상태는 영실쪽보다 풍성하다. 여기서부터 눈의 숲이 시작된다. 코스 입구까지 촘촘히 자리 잡은 소나무 군락에 어김없이 크고 풍성한 눈꽃이 피었고, 계단이었던 등산로는 그저 눈에 덮인 비탈길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어리목 쪽으로 향하면 탁 트인 비탈이 이어진다. 크고 작은 오름과 멀리 제주 바다가 보이고, 그날그날 하늘의 상황에 따라 구름과 빛이 하늘 그림을 그린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비경은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위쪽으로는 백록담을 비롯하여, 붉은오름, 누운오름, 장구목오름, 민대가리 동산이 보이고, 아래쪽으로는 어승생오름, 붉은오름, 노꼬메오름, 노루오름 등 십여개의 오름이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다. 이렇게 많은 오름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다.

▲ 한라산을 오르는 길이 눈터널을 이루고 있다.사진=뉴시스

불과 30분 만에 만세동산에 다다랐다. 만세동산의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망동산이라고도 부른다. 명칭은 동산이지만 실상은 원추형 오름이다. 맑은 날 여기서 바라다보는 제주시내 경치가 그만이다. 곧이어 만나는 사제비동산 역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사제비동산은 오름의 형상이 죽은 제비를 닮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오름 동쪽 기슭에는 제주도 먹는 물 공동시설 제1호인 유명한 사제비물이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겨울 한라산은 지금 올라야 제격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