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해진 박근혜 ‘10·26 승부수’ 실체

 박정희 33주기 추도식 참석해 대선승리 다짐   
공세적인 광폭행보로‘국민통합' 아이콘 선점 

10월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에게 잊을 수 없는 달이다. 이른바 부마(釜馬)사태로 알려진 부마민주항쟁(10월 16일), 유신헌법 선포일(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10월 26일) 등이 줄줄이 몰려 있다. 더구나 올해는 박 전 대통령이 단행한 ‘유신헌법 선포 40주년’이다. 박 후보는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한 바 있다. 따라서 평소 때라면 유신주간은 박 후보가 ‘조국 근대화의 지도자’인 아버지에 대한 추념으로 밤을 새우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간이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유신에 맞서 아버지를 공격했던 적장과 ‘독재타도’를 외쳤던 인사들을 선대위에 영입하며 국민화합을 호소하는 등 평소 소신과 다른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다.

부마항쟁 피해자 찾아 사과, 4·19묘역 전격 참배          
유신에 항거한 적장들 박 후보 지지자로 돌려세워 

▲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16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방문해 참배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77년 3월 서예학습 중인 박근혜 후보. 박 후보는 박정희 트라우마를 벗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신헌법 선포일인 지난 17일, 박 후보는 국회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대한민국의 미래 토론회’에 참석했다. ‘유신의 딸’이 유신에 반대한 ‘적장’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장을 찾은 것이다. 박 후보는 이날 축사에서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일화를 회고하며 “김 전 대통령은 ‘동서화합이 중요하고 여기서 실패하면 다른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내가 못한 것을 박 대표가 하라. 미안하지만 수고해 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제가 그 말에 보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이어 “그 길은 동서가 화합하고,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이 화합하고, 지역 간 갈등과 반목을 없애는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강조한 영호남 지역갈등 해소의 과제를 새누리당 후보인 자신이 이어받겠다는 뜻을 밝혔다. 과거의 사례를 본다면, 이희호 여사와 권노갑 김대중사업회 이사장 등 동교동계 핵심들이 참석한 자리인 만큼 민주당 대선후보인 문재인 후보가 응당 했어야 할 말이었다.

“박근혜는 동서화합 적임자”
박 후보가 동서화합을 내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작고한 후 공개된 자서전에서 “박근혜 대표가 날 찾아와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 사과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박 후보를 ‘동서화합’의 적임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박 후보는 대선 경선후보이던 2007년 8월에는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난 뒤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과 눈물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김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들은 바 있다.

정치권의 호남세력을 상징하는 구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동서화합의 기치를 내건 박 후보의 광폭행보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박 후보가 동서화합의 적임자라는 것은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이사장도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무소속 안철수 후보도 토론회에 참석했지만 국민통합의 메시지는 박 후보의 발언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다는 중론이다,    

박 후보는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김대중 대통령께서 국민통합의 리더십으로 경제위기를 이겨냈듯, 저도 국민대통합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국민통합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신 선포일인 이날 박 후보가 민주화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 관련 행사에 참석한 것은 부담스러운 ‘과거사 기념일’에 발목 잡히지 않고 정면돌파하겠다는 의미라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더 이상 ‘과거사 논란’이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박 후보 측의 포석이기도 하다. 박 후보는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가 ‘빠뜨린’ 4·19 묘지 참배를 단행하는 등 진보진영이 소홀히 한 ‘틈새’도 적극 공략했다. 박 후보는 16일 4·19 묘지를 참배하면서 “국민통합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반드시 풀어야 할 절박한 과제”라며 ‘통합 아이콘’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활용했다.  
 
유신반대 인사들 대거 영입
박 후보는 부마항쟁 하루 전인 15일에는 마산을 방문해 유신 체제 붕괴의 기폭제가 되었던 부마항쟁에 대해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린다. 아직 정리 안 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저와 새누리당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공개 사과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 원인으로 평가받는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였다. 그런 부마항쟁을 ‘유신공주’로 일컬어지는 박 후보가 민주화운동으로 받아들이고 피해보상까지 언급하자 당의 원로들도 놀랐다는 후문이다.

박 후보는 이틀 전 제주를 방문해서도 “4·3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희생자와 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앞장서겠다”며 제주도민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새누리당 ‘100%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도 부마민주항쟁의 주역인 이일호 목사를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내정하고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는 등 박 후보의 화합 행보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국민화합을 상징하는 인사들의 선대위 영입도 유신주간에 집중됐다. 동교동계 출신인 안동선·이윤수 전 민주당 의원과 상도동계 출신인 송천영·반형식 전 신한국당 의원 등 전직 국회의원 20명이 15일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과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한 것. 이들은  “우리는 유신 반대를 위해 격렬하게 투쟁했던 사람들이지만 오늘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민대통합을 위해 박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고 밝혀 박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날 입당한 인사들 중 유갑종 전 의원은 유신에 반대한 제1호 투옥인사이고, 이홍배 전 의원은 4·19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과거에 박 후보와 대척점에 섰던 인사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드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 지난 17일 김대중대통령 기념 토론회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와 안철수 후보. 이희호 여사가 박 후보의 구애를 받아줄 지 관심이 쏠린다. 사진=뉴시스

측근들 “박근혜가 독해졌다”
박 후보가 평소 같으면 ‘은인자중’해야 할 유신주간에 오히려 과거사 사과와 국민통합 행보를 가속화하는 것과 관련해 박 후보 선대위의 한 관계자는 “박 후보가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에게 위로의 뜻을 표명한 데 이어 바로 4·19 묘지를 참배한 것은 유신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 혁명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의 아픔이 치유돼야만 비로소 진정한 ‘100%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후보의 일련의 화합행보에는 대선 승리를 위한 박 후보의 강한 의지가 실려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 요즘 박 후보 캠프 주변에서는 박 후보가 독해졌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기세로 권력장악 의지가 확연히 엿보인다는 것이다. 박 후보의 한 측근은 “솔직히 과거사 문제를 역사에 맡기자는 처음 발언을 듣고서는 앞이 깜깜했는데, 후보께서 소신을 바꾸더라. ‘이 분이 권력의지가 대단하구나’라고 느꼈다”고 털어놨다. 유권자들은 후보자가 당선과 권력장악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보일 때 더 지지를 보낸다. 박 후보의 최근 지지율 상승은 이런 적극적인 행보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박 후보의 국민통합 행보가 ‘박정희 트라우마’를 벗어던지려는 박 후보의 적극적인 시도라는 해석도 있다. 박 후보가 지난 9월 24일, 과거사 논란에 대해 사과하긴 했지만 사실 자신의 트라우마인 ‘아버지에 대한 극복’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었다. 박 후보는 사과문 발표 때도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고개 숙여 사과한다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비켜갔다. 기자회견 말미에는 “국민들이 제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딸인 제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박 후보는 이번에 과거사 논란을 거치며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뇌를 겪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를 옹호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공과를 밝힌 뒤 자신이 짊어질 시대의 과제를 적극 수행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이라는 슬로건으로 구체화되어 광폭행보로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정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주목되는 것은 올해 10·26 추도식 때 박 후보가 밝힐 메시지다. 유신주간의 대미를 장식할 10·26은 박 후보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날이기도 하다. 박 후보는 자서전에서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며 당시의 고통을 표현한바 있다. 박 후보는 당시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동생들을 데리고 청와대를 제 발로 나가 이후 18년 동안 정치적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10·26은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기일일뿐만 아니라 박 후보가 권력을 잃은 자의 입장에서 정치권력이 가지는 힘과 의미를 비로소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된 날이기도 하다. 그만큼 소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박 후보는 해마다 10·26 때면 현충원의 박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해 아버지 무덤 앞에서 자신이 결심한 바를 밝히곤 했다. 지난 2009년 30주기 때는 추도문을 통해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건설이셨습니다”라고 말했고, 이후 박 후보가 복지이슈들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해 33주기를 맞는 추도식에는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의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관측된다. 인혁당 유가족 등을 포함해 유신시대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재차 밝히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이었던 지난해 10·26처럼 추도식에만 참석하고 인사말은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의 묘 앞에서 아버지의 최대 정적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셨던 인사들, 부마항쟁의 주역들과 나란히 서서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모습 하나로도 국민들에게는 인상적인 ‘그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아버지와 척을 졌던 인사들에게까지 손을 내밀며 평생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박 후보의 ‘10·26 승부수’는 과연 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는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박 후보가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독재정치밖에 없으니 분명히 민주주의를 퇴행시킬 것이라고 의심하는 시민에게 자신이 불통과 독선의 독재형 지도자가 아니라 소통과 공감의 민주주의적 리더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진정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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