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장학회 논란 4대 쟁점 정밀 검증

▲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정수장학회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사진= 뉴시스

▲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씨.
정수장학회 논란이 우려했던 친일(親日) 문제로 번졌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 씨를 ‘친일 부역자’이자 부정부패 기업가라고 몰아붙이자 김지태 씨 유족은 박 후보를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새누리당이 “정수장학회 문제는 중학생 시절 부일장학회 장학생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지태 대표에 대한 은혜 갚기로부터 시작됐다”며 민주당을 공격하자 민주당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에 불합격되자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해 입교해서 독립군에게 총을 쏘고 그 우수함을 인정받아 일본 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며 고 박정희대통령의 친일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새누리당을 맹공격했다.

 김지태, 정치자금 안 줘 박정희에게 찍혔다?   
“전 처남 고발로 수사” vs “장면 정부 지지한 탓”

지난 10월 20일 박근혜 후보는 기자회견을 갖고 ‘정수장학회가 부일장학회 설립자 김지태 씨의 재산을 강탈해 설립됐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대해 “김지태 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은 분이다. 4·19 때부터 (부정부패) 명단에 올라 분노한 시민이 집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부패 혐의로 징역 7년형을 구형받기도 했다”며 김 씨가 친일 부역자이며 부정부패자라고 주장해 논란을 자초했다.

“동척 근무만으로는 친일 아니다”   
김지태 씨와 관련된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짚어봐야 할 부분은 친일논란이다. 김지태 씨(1908~1982년)는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과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라는 평전 등을 남겼다. 이에 따르면, 김 씨는 1927년 부산 제2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장 추천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에 입사했다. 그는 5년 뒤인 1932년 폐결핵으로 퇴사할 때까지 일본의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척 부산지점에서 근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동척에 근무했다는 것만으로 친일분자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게 친일 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병상)는 <친일 인명사전> 수록 기준을 정해놓고 있는데, 경제 분야는 ‘국책 경제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과 경제 단체의 간부’라고 적고 있다. 김 씨는 스무 살 안팎의 나이에 서기로 5년간 일했기 때문에 당시 ‘간부’는 아니었다. 적극적인 친일이 아니기 때문에 수탈기관에 근무한 것만으로는 친일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소의 판단이다.  

두 번째, 김지태 씨가 정말 부정부패한 기업가였는지도 논란거리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김 씨는 동양척식회사를 나와 1934년에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김 씨를 좋게 본 일본인 지점장이 울산의 동척 소유 전답 2만 평을 그에게 헐값에 넘긴 게 부를 이루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김 씨는 35년에 울산 농장을 담보로 조선지기(제지업체)를 인수했다가 일본의 만주침략과 태평양전쟁 특수로 큰돈을 벌었다. 이후 조선주철(1943년 획득)을 경영하고 부동산, 실크섬유, 고무산업에 투자해 해방 당시에는 부산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했다.

김 씨는 정치인으로도 변신에 성공해 1950~1958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부산에서 두 번이나 무소속으로 당선됐는데,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제명당하고 다시 복당하고 제명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부산에서 ‘조선견직’이라는 대기업체를 운영했고, 1947년부터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회 회장을 맡는 등 부산시를 위해 적극 활동했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일보를 인수하고 한국문화방송(MBC)을 설립했다. 문제는 그가 부산에서 상당한 부자였기 때문에 늘 정치권력의 견제에 시달렸고,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데 있다. 

부패기업인인지 명확하지 않아
김지태 씨 자서전에 따르면, 부산 범일동 소재 ‘조선방직’은 당시 조선 최대의 제조업체였다. 김씨는 1948년 3월부터 이 회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1951년 3월의 적산 불하를 받을 ‘연고자’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하 예정일을 사흘 앞둔 1951년 3월 16일 회사 간부 거의 전원이 김창룡 특무대장이 지휘하던 군검경합동수사본부에 ‘이적죄’로 체포되었다. 국회가 개회 중이었기 때문에 현역 의원인 김 씨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양아들로 통하던 강일매에게 불하됐다고 한다. 김 씨는 이 사건이 다음 대통령으로 장면을 밀고 있던 자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고 자서전에서 주장했다. 부산에서는 그가 이승만의 정치자금 요구를 거절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설도 떠돌았다고 한다.  

김 씨는 이후 5·16으로 군부가 집권한 뒤인 62년 4월 부정축재와 재산도피 등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됐다. 중앙정보부는 그에게 부정축재처리법, 외국환관리법, 농지개혁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적용했다. 당시 김 씨의 부인 송혜영 씨가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반지를 밀수한 혐의로 먼저 구속됐고, 해외출장 중이던 김 씨는 귀국과 함께 연행돼 재판을 받았다. 김 씨는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구형받은 뒤 재산 포기각서와 기부승낙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틀 후 군 검찰의 공소취소로 석방됐다. 이처럼 김 씨가 5.16 이후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 씨 유족은 당시 김 씨뿐만 아니라 유력 기업인 26명이 한꺼번에 부정축재자로 잡혀 들어갔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버지는 정권에 의한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납인가? 강탈인가?
세 번째, 김 씨가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MBC 주식을 ‘헌납’했는지 군사정부가 ‘강탈’했는지도 논란거리다. 김지태 씨가 1958년 설립한 부일장학회는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김 씨가 국내재산 해외도피 혐의로 구속된 뒤 장학회가 소유한 땅 10만 평, 부산일보, 부산 MBC와 함께 국가에 헌납됐다. 이와 관련해 박 후보 측 공보단장인 이정현 전 의원은 “1971년 신문 인터뷰와 1976년 (김지태씨) 본인이 직접 쓴 책을 보면, 부산일보 재산을 나라에 바쳐 부의 사회 환원을 했다거나 부일장학회는 영원할 것이므로 (헌납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며 ‘헌납’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정현 공보단장의 주장처럼 지금까지는 김지태 씨가 박정희 대통령과 연이 닿는 인사를 통해 재산을 헌납하고 풀려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때인 1974년부터 청와대에서 7년간 민정비서관을 지낸 이기창 변호사는 “김지태 씨가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 결혼을 했는데, 새 부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 이걸 원래 부인의 남동생, 즉 처남이 밀수한 다이아몬드 반지라고 해서 고발을 한 것이 수사의 계기가 됐다”며 “김지태 씨가 구속이 되니까 땅을 내놓겠다고 해서 국방부에 기증서를 내놨고, 수사를 맡은 군 검찰관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까 김 씨가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을 통해서 최고회의 쪽에 5·16장학회에 땅을 내놓겠다고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또 “당시 김 씨는 풀려났고 외화를 많이 배정받아서 돈도 많이 벌었다”며 ‘헌납’이 김지태씨의 자발적 의사였음을 시사했다.

반면 유족의 입장은 다르다. 김지태 씨의 차남 김영우 씨(70)는 “지난 2005년 국가정보원 자체 조사에서도 ‘강탈’이라고 결론이 나왔고,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원상회복 및 국가가 배상하라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고 반박했다.

형식적으로만 헌납일 뿐 내용적으로는 ‘강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김 씨가 장면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던 만큼 박정희 쿠데타세력에 밉보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역사학자 김기협 씨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있던 박정희가 김지태에게 5·16 거사 자금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원한으로 그를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시중에 파다했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국민통합위 특단의 해법 모색 중
네 번째, 김 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의 지분을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하는지도 논란거리다. 박근혜 후보는 “(5·16장학회는) 김 씨가 헌납한 재산이 (재단의 기금에) 포함된 게 사실이지만 국내뿐 아니라 해외동포까지 많은 분의 성금으로 새롭게 만든 재단”이라며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기여도를 깎아내렸다. 이정현 공보단장은 “김지태 씨가 헌납한 돈은 전체의 5.8%인 6700여만 원”뿐이라고까지 폄훼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에서 밝힌 ‘5·16장학회’ 재산 내역을 보면, 당시 외부 기부금은 스코필드 37만 2500환, 하와이 교포 1000여만 환, 이병철 씨 1억 환, 경제인연합회 회장 3000만 환 등 1억 4037만여 환에 불과했다. 반면 김지태 씨 재산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등 주식 5만 3100주 3억 4872만 5000여환에 토지 10만 147평 등이다. 김지태 씨 재산이 가장 많다.

이런 배경으로 박 후보 측 이상돈 정치쇄신특위 위원은 “김지태 씨 후손들의 이사진 참여”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최필립 씨는 “내가 그만두면 곽노현 ‘형무소 동기’들이 정수장학회를 장악한다”며 사퇴에 반대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지난 2004년, <오마이뉴스>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모금 캠페인에 성금을 낸 적 있을 정도로 ‘친일’ 문제에 민감하다. 당연히 친일논란을 빚고 있는 김지태 씨 유족을 이사회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현재 새누리당 ‘100%국민대통합 위원회’(수석부위원장 한광옥)는 김지태 씨 유족과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 쪽을 두루 접촉해 해법을 모색 중이다. 과거사를 털고 미래로 가려는 박근혜 후보에겐 묘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스기사 / 안철수 후보 할아버지도 친일?

“일제 때 금융조합 간부로 근무”

▲ 안철수후보도 할아버지도
친일논란에 휩싸였다. 사진= 뉴시스
안철수 후보의 할아버지가 친일 구설수에 올랐다. 인터넷과 보수언론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된 사안으로, 안 후보의 할아버지인 고 안호인 옹이 일제강점기 때 금융조합 간부로 일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안 후보 측 선대위는 이에 대해 “안 후보 할아버지가 금융조합에서 일했는지는 확인할 자료가 없고, 경남 사천 쪽에 있던 조선미창(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퇴직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조선미창은 대한통운의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쌀 수탈과 군수물자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다.

안 후보의 할아버지는 경남 양산 출신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에서 일하다 해방 후 농업은행 지점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의 금융조합은 총독부 감독 아래 화폐정리 사업이나 토지조사, 세금수탈을 도맡았고, 전쟁물자를 공출하는 창구 역할을 했던 기관으로 해방 후 농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일제 때 친일기관에 단순히 근무했다는 것만으로는 친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은 ‘국책경제기관의 간부’로 규정하고 있고, 반민족행위자특별법도 친일행위 기준을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안 후보 할아버지가 설사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고 해도 친일파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는 다르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는데 이는 반민족행위자특별법에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 새누리당은 친일문제를 거론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셈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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