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프로골퍼들 피 말리는 ‘50위 경쟁’ 막후

▲ 정희원 선수가 갤러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언샷을 날리고 있다. 사진=KLPGA 제공

‘살아남아야만 한다. 내년에도 화려한 무대에서 활약하려면 최소한 50위에 턱걸이라도 해야 한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이제 마지막 한 개 대회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 마지막 대회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ADT캡스챔피언십이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골프팬들의 관심은 당연히 상금왕은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쏠리고 있다.
하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상금왕에 대한 관심은 배부른 소리다. 정말 톱 프로 몇 명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보다 더 치열한 곳이 바로 ‘50위 경쟁’이다. 상금랭킹 50위 안에 들어야 내년에 또 투어를 뛸 수 있다. 50위 밖으로 밀린 선수들은 시드전을 치러야 한다. 선수들은 시드전을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올해는 마지막 대회가 싱가포르에서 열려 커트라인에 걸려 있는 선수들을 더욱 긴장케 하고 있다.
 

50위 경쟁은 1위 경쟁보다 훨씬 치열하다. 지난해 마지막 대회인 ADT캡스챔피언십이 열린 제주 롯데스카이힐골프장. 이미 날씨는 가을을 지나 겨울의 한가운데 와 있었다. 특히 한라산 기슭의 이 골프장은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50위 안에 들어야만 하는 선수들의 마음은 날씨보다도 훨씬 더 추웠다.

선수들의 이런 마음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바람은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플레이시간이 6시간을 넘어갔지만 경기 속도를 조절해야 할 경기위원들은 선수들에게 빠른 플레이를 주문할 수 없었다. 50위권에 있는 선수들에게는 한 타 한 타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황이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보니 경기는 해가 어둑어둑 서쪽 바다에 가라앉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미 LPGA만큼 힘든 시드 유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드를 유지하는 것만큼 힘들었다.”(배경은·28·넵스)
LPGA투어에서 활약하다 지난해 국내로 복귀한 배경은은 지난해 KLPGA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ADT캡스챔피언십에서의 긴장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올 시즌 정규투어에 나가기 위해서는 상금순위 50위 이내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배경은은 마지막 대회를 앞두고 50위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자칫 시드를 얻지 못할 경우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상황도 빚어질 수 있었다.

▲ 배경은 선수가 아이언샷 후 볼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KLPGA 제공
최종 결과는 50위. 마지막에 행운이 따르면서 커트라인에 딱 걸렸다. 당시 50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정희원이 대회 마지막 파5홀에서 보기를 범하면서 공동 10위로 대회를 마쳤다. 520만 원의 상금을 받은 정희원은 결국 배경은과의 100만 원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52위로 정규투어 직행이 무산됐다. 만약 정희원이 파를 기록해 공동 7위에 올랐다면 상금 1000만 원으로 배경은을 51위로 밀어내고 정규투어에 진출할 수 있었다.

배경은은 “하마터면 ‘총성 없는 전쟁터’에 끌려갈 뻔했다. 만약 출전 자격을 잃었다면 수억 원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며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천신만고 끝에 정규투어 자격을 유지한 배경은은 후원사와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배경은은 현재 1억 4200만 원을 벌어 상금순위 23위에 올라 있다.
“이제 시드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무엇보다 기쁘다.”(정희원·22·핑)

정희원. 지난해 마지막 대회인 ADT캡스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범하며 상금랭킹 52위에 머물렀던 바로 그 선수는 이어 전남 무안CC에서 열린 시드전에 나가야 했다. 다행히 정희원은 시드전을 통해 정규투어 출전권을 얻었고, 지난 9월 KLPGA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물론 생애 첫 우승이었다. 생애 첫 승을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정희원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소리가 “이젠 무안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죠. 너무너무 기뻐요”라는 것이었다.

생애 첫 승을 거두며 우승상금으로 1억 4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거머쥔 선수의 입에서 나온 이 소리는 시드전의 살벌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지옥의 레이스 4라운드
KLPGA투어는 올해 21개의 대회를 치렀고, 한 개 대회만을 남기고 있다. 올해 상금규모는 130억 원에 가깝다. 하지만 이 화려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선수는 108명(초청선수 포함)에 불과하다. 이중 다음해에도 살아남는 선수는 50명이다. 나머지는 정규투어 출전을 위해 1년을 기다려온 예비자들과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시드전을 치러야 한다. 시드전은 선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곳이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어떡해서든 살아남겠다.”(안송이·22·KB금융그룹)
선수들이 시드전을 기피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드전은 예선 2라운드와 본선 4라운드로 펼쳐진다. 2주 동안 6라운드를 치러야 하는 힘든 일정도 그렇지만, 라운드마다 벌어지는 치열한 순위싸움은 피를 말린다. 시드전 순위 최종 50명에게만 다음해 전 경기 출전권이 주어진다. 이후는 순위에 따라 조건부 출전권이 부여된다. 떨어지면 1년을 쉬어야 한다. LPGA투어에서 활약하다 국내에 복귀한 정일미는 지난해 시드전 탈락 후 은퇴했다.

시드전에 350여 명 몰려
지난해 시드전에는 무려 350여 명의 선수가 몰렸다. 7 대 1의 높은 경쟁률. 그러니 바늘구멍이라는 말이 딱 맞다. 올해 시드전은 13일부터 16일까지 예선이, 그리고 20일부터 23일까지 본선이 전남 무안CC에서 열린다. 예선은 KLPGA 정회원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1, 2조로 나뉘어 2라운드 경기를 펼치고 결과에 따라 본선 진출자가 가려진다. 본선 진출자들은 올 시즌 KLPGT 상금순위 51~70위의 선수들과 다시 4라운드의 경기를 치러야 한다. 실로 지옥의 레이스라 부를 만하다.

올해 KLPGA투어에서 상금을 획득한 선수는 모두 103명이다. 1위 김하늘이 4억 5500만 원을 거머쥐었지만 103위 강민주(22·하이마트)는 431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투어 대회에 출전하려면 숙박비와 연습라운드 비용, 캐디피, 그리고 교통비 등을 모두 선수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1억 원은 벌어야 경비가 빠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1억 원 이상을 번 선수는 31명에 불과하다.

무안CC의 혈투
정규투어에서 50위에 들어야 다음해 모든 대회의 출전이 보장된다. 51위부터 70위까지는 시드전 예선이 면제된다. 지옥의 레이스 4라운드를 펼쳐야 하지만 예선 2라운드를 면제받는 것도 큰 혜택이다. 현재 50위는 오안나(23·롯데마트)로 5600만 원을 벌었다. 70위는 홍슬기(24·현대스위스)로 330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올해 마지막 대회는 싱가포르에서 치러진다. ADT캡스챔피언십은 60명만이 출전해 컷 탈락 없이 모두가 상금을 받을 수 있는 대회다.
지난해에는 제주에서 대회가 열렸다. 그러다보니 상금랭킹 50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선수들은 대회 도중에 포기하고 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년 투어 출전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시드전을 통하는 것이기에 보장된 상금을 포기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하루라도 빨리 무안에 도착해 연습라운드라도 한 번 더 하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선수들은 ‘지옥’으로 불리는 무안CC로 향한다.
그러나 올해는 이마저도 사치다. 싱가포르에서 경기가 열려 어차피 대회를 마쳐야 무안에 올 수 있다.
저마다 꿈을 안고 우승을 향해 뛰는 KLPGA투어 무대. 그 화려한 무대 뒤에는 피를 말리는 전쟁터가 있고, 그 곳에서 많은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저작권자 © 위클리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