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 버락 오바마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7일 자신의 재선이 확정된 뒤 시카고에서 열린 집회에서 부인 미셸 여사 및 두 딸 말리아, 사샤와 함께 연단에 올라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로이터/뉴시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51)이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흑인 출신 재선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초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던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싱겁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낙승했다. 대다수 ‘스윙스테이트’(경합주)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일찌감치 미트 롬니 후보를 이기면서 재선을 확정지은 것. 전통적인 민주당 우세지역(블루스테이트)과 공화당 우세지역(레드스테이트)에서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주당 우세지역인 동부와 서부는 오바마를 지지했고, 남부와 중서부 지역은 공화당을 선택했다. 미국의 제 44·45대 대통령 오바마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친한파(親韓派) 대통령이며, 농구광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오바마의 다양한 모습들을 공개한다. 

백인과 흑인 혼혈아로 어린 시절 ‘유랑’생활
금세기 美 대통령 중 최고지지율, 노벨평화상 수상 

유별난 한국사랑 
오바마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을 보라!”고 말한다. 그는 취임 이후 한국의 교육열과 정보산업(IT) 인프라 등에 대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칭찬해왔다. 지난 2009년 3월 미국 교육 비전을 설명하는 연설에서 오바마는 “미국 학생의 등교 일수가 한국 학생보다 한 달 정도 더 적다. 한국에서 하는 일을 왜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9월 일자리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 직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뉴욕에서 가진 행사에서는 “한국은 초등학교 1학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원어민 선생을 수입하고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며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지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해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교사를 늘리는 동안 우리는 해고하고 있다. 더 많은 교원 인력을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오바마가 한국 교육제도와 교육열에 높은 관심을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오바마는 올해 5월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지리 퀴즈대회에 퀴즈 출제자로 출연했다. 이 퀴즈대회는 무려 400만 명이 참여했는데, 10명의 학생이 최종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 녹화 영상을 통해 퀴즈를 출제한 오바마가 낸 문제는 지난 3월 핵안보 정상회의가 개최된 한강이 있는 아시아의 한 수도가 어디인지를 맞추는 것이었다. 정답은 ‘서울’이었다. 10명의 학생들 가운데 9명이 정답을 맞혔다. 

오바마는 또한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한국의 정보기술(IT) 인프라를 미국이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수시로 강조해 왔다. ‘워싱턴’과 거의 인연이 없는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WB) 총재가 된 것도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가 큰 힘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링컨이 롤모델
변호사 출신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같은 변호사 출신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 미국 제16대 대통령이다. 오바마는 링컨 대통령이 남부 출신 연극배우 부스에게 암살당한 워싱턴 DC의 포드 극장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세기 때 주로 남부에 살던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많은 차별 대우를 당했는데, 링컨 대통령은  백인이면서도 흑인에 대한 자유와 평등사상을 주장했고, 투표권을 줄 것을 주장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1월 19일, 미국 남북전쟁의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州) 게티즈버그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연설을 통해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했고, 이후 흑인 해방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흑인이 최초로 북군의 군대에 투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흑인 해방은 1865년, 북부가 완전히 남부를 이긴 다음에 이루어졌다. 이런 링컨 대통령의 평등사상은 훗날 200년이 지나 흑인 대통령을 꿈꾸던 버락 오바마에게 이어졌다. 

2007년 2월 10일, 오바마는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의 옛 주 정부 청사 건물 앞에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오바마가 발표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858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화당 지명으로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첫 출마하면서 거물급 현역인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토론회에서 “분열된 집(a house divided)은 살아남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도 지속될 수 없다”는 명연설을 했던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된 뒤 시카고에 위치한 민주당 선거본부에서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보여준 것은 비록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멀고 험하지만 우리 스스로 싸우고 일어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며 국민들을 격려하고 함께 당선을 축하했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의 ‘통합’을 강조하며 국민과 함께 가고자 하는 오바마의 정책은 이처럼 링컨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이유
오바마는 2009년 10월 9일, 취임 후 10개월 만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이후 교착 상태에 빠진 중동평화회담 재개와 군축을 위해 노력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탁월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고,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세계 민주주의 증진과 인종·종교 간 장벽을 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노벨상 선정 이유로 설명했다. 전임 대통령이던 강경파 부시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에서 급선회한 점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오바마는 2008년에 ‘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선정됐을 정도로 취임 무렵 미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USA투데이>와 갤럽이 2008년 12월 12~14일 미국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당시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전체 응답자 가운데 32%의 지지를 얻어 1위에 올랐다.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1위에 오른 경우는 1948년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한다.

오바마의 지지율은 2008년 12월에는 76%로 점점 높아지더니 대통령 취임일 직전인 1월 20일에는 <워싱턴 포스트>(WP)와 ABC방송의 여론조사에서 80%의 지지율을 받았다. 이는 1930년대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당시 오바마 지지도는 여성, 흑인, 만 40세 이하의 연령층에서 몰표가 나왔다.

가족사 복잡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Barack Hussein Obama)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중남 아메리카에 사는 백인과 흑인의 1대 혼혈아)다. 그의 가족사는 복잡한 인종이 모여 사는 지금의 미국만큼이나 복잡하다. 

오바마는 1961년 8월 4일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의 카피올라니 병원에서 캔자스 주 위치토 출신의 영국계 미국인 학생 ‘스탠리 앤 던햄’과 케냐 식민지 니안자 주 니양오마 코겔로 출신의 루오족 유학생인 ‘버락 오바마 시니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의 부모는 1960년, 아버지 오바마가 해외 장학생으로 있던 마노아의 하와이 대학교의 러시아어 수업에서 처음 만나 이듬해인 1961년 2월 2일에 결혼했는데, 같은 해 버락 오바마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두 살이던 해 오바마 부부는 별거했고, 1964년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이혼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재혼한 뒤 케냐로 돌아가 두 아들 ‘데이비드’와 ‘마크 은데산조’를 낳았다. 그는 1982년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아들 오바마를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어머니 던햄은 그대로 하와이에 살다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토로’와 재혼했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1967년에 정권을 잡으면서 해외에 있던 모든 인도네시아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소환되자 던햄과 수토로 가족도 인도네시아로 이사 가게 됐다. 오바마도 이 때문에 6세부터 10세 때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베수키 공립학교와 아사시의 성 프란체스코 학교 등을 다녔고, 1971년, 외조부모인 매들린과 스탠리 아머 던햄과 같이 살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오바마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버지는 내 주변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점, 즉 아버지는 피치처럼 시꺼멓고, 어머니는 우유처럼 하얗다는 것을 나는 개의치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또한 오바마는 호놀룰루에서 지낸 자신의 성장기를 반추하며 “하와이에서 상호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것은 내 세계관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내가 가장 아끼는 가치의 근간이 되었다”라고 썼다.

NBA 꿈꾸던 ‘농구 천재’
농구는 오바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키워드다. 그는 어렸을 때 백인들로부터 놀림을 받을 때면 농구를 하면서 울분을 풀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하와이에서 보낸 10대 시절 오바마의 꿈은 미국 프로농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1970년대를 풍미한 공격수 네이트 아키발드의 묘기를 연습했고, 방에는 전설적인 농구 스타 줄리어스 어빙(일명 닥터 J)이 솟구쳐 오르며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당시 오바마는 길을 걸을 때도 TV에 나온 프로농구 스타처럼 걸었고 수업 시작 전 30분간은 농구 경기를 했다고 한다.

농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하와이 푸나호우 고등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배리 오바머’(Barry O’Bomber, 폭탄 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시 오바마는 변호사가 장래 희망이던 한 친구에게 “내가 언젠가 프로 선수가 돼 팀을 상대로 연봉을 올려달라고 소송을 걸면 널 부를게”라고 써주기도 했다. 학창시절, 농구는 그에게 위안을 주는 안식처이자 자기표현의 방식이었으며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결점이었다. 캔자스주에 정착한 백인 외조부모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에게 농구는 낯설었던 흑인 문화와 ‘흑인 됨’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 관문이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미국농구협회(NBA)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9년 1월 20일 취임과 동시에 1969년 이후 백악관에 설치되어있던 볼링경기장을 개축, 실내농구경기장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백악관 농구 경기장에서 정기적으로 보좌관들과 농구 경기를 한다. 2009년 워싱턴DC 연고팀인 워싱턴 위자드와 고향인 시카고 불스의 시합이 워싱턴DC에서 열렸을 때는 경기장까지 찾아가 시카고 불스를 응원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1일 미국 대학농구(NCAA) 개막전이 항공모함 칼빈슨호 갑판에서 열린 것도 오바마의 농구열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선거 날 농구를 하면 이긴다는 징크스가 있다. 올 1월 3일 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처음 벌어진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두고 농구를 했고, 코커스에서 이겼다. 이후 농구를 하지 않은 같은 달 8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패배했고, 그 이후에는 주요지역 경선을 앞두고 꼭 농구를 했다고 한다. 
 

박스기사 / ‘오바마 당선’ 바라보는 ‘빅3 후보’ 시선


박근혜 ‘여성대통령’ 문재인 ‘민주당 집권’
안철수는 ‘평화정착’, 캠프마다 유리한 해석 

빅3 대선 후보들은 일제히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각 캠프마다 서로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미국에서 소수민족인 흑인 출신 대통령이 탄생해서 미국사회의 흑백갈등의 벽을 무너뜨리고 사회통합의 길에 앞장서는 지도자가 됐다”고 축하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그 자체가 쇄신이고 그것보다 더 큰 변화는 없다”고 말했다. 소수자, 비주류를 상징하는 오바마의 흑인대통령 이미지에 자신의 ‘여성대통령’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역대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보수·미국의 진보정권’ 조합이 가장 우호적이었다고 보고 있는  여권은 오바마 2기 행정부와의 조합에서도 보수 주자인 박 후보가 정책적 공통분모로 가장 안정적 조합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후보 측은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미국의 기대치에 근접해 있다고 보고 있다. 

민주당은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계기로 미국의 한반도 평화정책이 정착되고, 북핵문제에 평화적 해법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환영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 캠프 진성준 대변인은 “지금까지 미국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한국에는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이 공화당 정권일 땐 한국에 민주당이 집권하는 엇갈린 역사가 있었다”며 “민주당은 국민과 함께 오는 12월 대선에서 문 후보를 반드시 당선시켜 한미 양국 리더십의 얄궂은 엇갈림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와 양국에 축복이 깃드는 시대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승리해서 한미 간에 같은 민주당정권이 집권해야 한다는 데 방점이 찍혔다.

문 후보로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변호사 출신이고 진보적이라는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안철수 후보 캠프의 유민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미국의 번영과 세계 평화에 큰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 대변인은 이어 “무엇보다 한미 양국 간에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 한반도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안철 후보 측은 오바마의 개혁성을 높이 사면서 ‘평화정착’를 강조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와 오바마 대통령은 각각 1962년 1월생, 1961년 8월생으로 같은 또래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정서적 유대감을 내세우고 있다.

문·안 두 후보 모두 한·미 공조를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한·미FTA 재협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야권 후보들이 당선될 경우 정부 초기 한·미 간 냉기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문재인 후보는 “FTA 재협상을 하되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등 일부 독소조항만 재협상한다”는 방침이고, 안 후보 측은 일부 독소조항의 문제점이 현실화될 경우에는 협정문 개정 등 적극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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