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과 그의 아내 펑리위안. 사진=뉴시스

 

배짱 두둑하고 원만한 전형적인 대륙스타일  
자기관리 능력 뛰어난 대기만성형 정치가

지난 15일 시진핑(習近平·59)이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에 선출되고 중앙군사위 주석에 임명됐다. 미국과 함께 G2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 시진핑은 내년 3월에 국가주석 자리에 오르면 당·정·군을 모두 장악, 명실공히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진핑은 어떤 인물일까. 시진핑과 관련된 키워드 5개로 그를 분석해보자. 

‘상하이방’ 장쩌민의 후원으로 대권 잡아
개혁·개방의 부작용 해결에 주안점 예상

시진핑은 1953년 6월, 산시(陝西)성 푸핑(富平)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시중쉰(習仲勛·1913~2002)은 1952년 공산당 중앙선전부장, 1959년 국무원 부총리까지 지낸 혁명원로로 덩샤오핑보다 더 확고한 개혁개방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은 개국공신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중국 내 보수와 진보세력의 지지를 모두 받는 정치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시진핑은 태자당으로 분류되는데, 태자당은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의 자제와 친인척들로 구성된 정치 계파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부모의 후광을 제대로 받는 집단이다. 이들은 당·정·군·재계 고위층의 자녀들로 덩샤오핑의 자녀 및 사위를 비롯해 약 4000명이 핵심 요직에 포진해 있다. 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즐긴 여느 태자당 출신들과 달리 시진핑은 인생의 굴곡을 겪었다.

혁명원로의 자제인 태자당
시진핑이 소학교에 입학하던 1962년, 부친 시중쉰은 소설 ‘류즈단(劉志丹) 사건’(공산당을 반대한 연재소설로 6만여 명이 연루되고 6000여 명이 숨지면서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된 사건)에 휩쓸리면서 구속됐다. 전쟁 영웅 ‘펑덕회’의 측근이었던 시중쉰은 ‘대약진 운동’을 거세게 비판했던 펑덕회가 실각하면서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산시성 오지로 하방(下放)되었다. 이 때문에 아들 시진핑 등 가족들까지 농촌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구금돼 조사를 받던 시중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이 일로 마오쩌둥이 시중쉰을 자신과 가까운 곳에 구금하도록 하면서 차츰 명예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시중쉰은 마침내 13년 만인 1975년 복권됐고, 78년 광둥성 당 제2서기로 정계에 복귀했다. 시진핑도 베이징에 돌아와 1979년 중국 최고 명문인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중국농촌의 시장화를 위한 법제 건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정치인 비서에서 관료로 성공 
칭화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국무원 판공청에서 당시 부총리였던 ‘겅뱌오’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 부서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1982년부터 3년간 허베이성 정딩(正定)현에서 당위원회 부서기·서기로 근무했다. 1985년 6월, 타이완에 근접한 동부 연해 남쪽의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출세가도에 들어선다. 2002년까지 17년여 동안 푸젠성 샤먼(廈門)시, 푸저우(福州)시의 당위원회 서기를 거쳤고, 푸젠성 당 부서기와 성장을 지내며 부패관리들에 대한 척결, 물가안정, 민생경제, 개방경제 도약과 같은 현안들을 잘 처리해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후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동부 연해의 대표적인 부자 성(省)인 저장성 당 서기를 지내며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시진핑이 특히 중앙무대에서 부각된 것은 2007년 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가 비리 문제로 낙마한 사건 이후였다. 저장성 서기로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빛에 가려져 있던 시 진핑은 천량위가 낙마하자 상하이시 당 서기로 중용된 데 이어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 상무부총리를 제치고 사실상 차기 후계자로 낙점됐다. 여기에는 그의 후견자인 상하이방의 막후 실력자인 장쩌민 전 주석의 강한 입김이 작용했다.

중국 대륙을 이끄는 9명의 리더그룹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한 시진핑은 2008년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돼 차기 대권을 예약했다. 이때부터 제5세대 지도자들 가운데 선두를 달렸고, 2010년에 차기 대권 승계를 의미하는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됐다. 그리고 마침내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연합세력이 세운 간판얼굴로 옹립돼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는 최고 권좌를 이어 받았다.

좌우명은 후덕재물(厚德載物)
시진핑은 자제력과 자기 관리가 뛰어난 대기만성형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배짱이 두둑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대륙스타일이다. 그의 좌우명은 ‘후덕재물’(厚德載物)인데, 이는   <주역>에 나오는 문구로 ‘덕을 두텁게 하여 만물을 싣는다(포용한다)’는 뜻이다. 후덕재물은 시진핑의 품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시진핑이 졸업한 칭화대학교의 교훈이기도 하다. 공식적 자리든, 사석이든 과묵하고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는 시진핑의 처세술 역시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또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는 <논어>의 구절도 금과옥조처럼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은 이 구절을 늘 시진핑에게 강조했는데, 후덕재물이나 이 말이나 모두 덕(후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겉은 부드럽고, 속은 엄격한” 처세철학이 시진핑 자신을 13억 인민의 리더로 올라서게 한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2008년 중국 정부의 2인자인 중국 부주석을 맡았으면서도 본격적인 전면 행보를 자제하면서 특유의 과묵함을 보여와 속마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로 꼽혀왔다. 

▲ 2009년 12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부주석이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축구 좋아하는 친한파 
시진핑은 ‘친한파’로 불린다. 축구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한국 축구에 대해 부러움을 표시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중 한국대사가 “얼마 전에 한-중 프로축구팀 간 대결에서 중국 팀이 대승을 거둔 적도 있다”라고 하자, 시진핑은 대뜸 “당시 중국 팀은 광저우 헝다로, 한국인 이장수 감독이 있었을 때였죠”라고 대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진핑은 박준영 전라남도 지사와는 서로를 ‘라오펑요우’(老朋友, 오랜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2005년 당시 저장(浙江)성 당 서기였던 시진핑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전남도의 박 지사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후 8년 동안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 김하중 전 주중대사, 류우익 통일부 장관 등과도 교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다. 2009년 12월 16일에도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기도 했다.

시진핑은 지난 2010년 6월 25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항미원조전쟁 60주년 기념식’에서 “6·25는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남침을 부정하는 듯한 의미로 해석돼 한바탕 논란을 빚었으나 문제가 되자 곧바로 해명해 오해를 풀었다. 후진타오 체제에 비해 유화적이고 대외 친화적인 동아시아 외교를 펼칠 것으로 기대되는 시진핑은 내년에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포기 모르는 불굴의 의지 
시진핑은 아버지인 시중쉰이 문화혁명으로 추락하면서 13세 때 소년교화소에 보내졌다. 16세 때는 산간벽지로 쫓겨나 토굴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1969년에는 부모의 감금에 대해 베이징에서 항의하다가 구치소에 반 년 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바닥에서 일어서는 방법을 알았다. 산골에서 ‘반동자식’으로 10년을 보내면서도 공산당에 입당원서를 집요하게 보냈다. 그는 10번 이상 공산당 입당원서를 제출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73년 끝내 공산당에 가입해 살길을 찾는다. 당시 성실하면서도 믿음직한 청년이었던 그를 눈여겨본 현 당서기의 추천으로 1973년 공산당 입당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시진핑은 칭화대학 공정화학과를 다니다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에 하방돼 7년간 농촌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당시 생활이 “실사구시와 인민대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자신감을 키울 수 있게 한 소중한 기회였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내 숙소는 현지의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드렸고 당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를 통해 시진핑은 사회적 성숙을 이루게 되고, 차츰 공산당 활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그의 장점을 발휘해간다.

이런 이유로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시진핑이 ‘모택동보다 더 붉은 사상으로 생존의 길을 찾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리광요 전 싱가포르 총리는 “시진핑은 만델라급 인물이다. 자기가 겪은 일로 인해 감정이 좌우되지 않을 정도의 안정감을 갖춘 인물”이라고 말했고,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부 장관도 “시진핑은 어떻게 하면 일이 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웃고 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만만찮은 남자’ 시진핑을 상대할 대한민국 대통령은 배짱이 두둑해야 할 것 같다.
 

박스기사 / 촉망받는 당 관료와 가요계 스타의 만남

시진핑과 펑리위안의 러브스토리

시진핑의 아내이자 중국 인민해방군 소장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중국 대륙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가요계 스타다. ‘희망의 전야에서’(在希望的田野上)란 그녀의 노래가 특히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이 때문에 간혹 시진핑보다 더 유명한 아내라는 소릴 듣기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26년 전인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샤먼시 부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진핑은 1980년대 초 커화 전 주 영국 대사의 막내딸 커링링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여가수 펑리위안을 소개받게 된다. 펑리위안은 시진핑보다 아홉 살 어리며, 산둥(山東)성 시골의 보통 농가에서 태어났다. 산둥예술학원을 졸업한 뒤 18세 때부터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문공단(文工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용모를 지닌 펑리위안은 시진핑을 처음 만나는 날 일부러 투박한 군용 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시진핑이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확인할 심산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 고위 관료답지 않게 ‘촌티 나고 나이 들어 보였던’ 당시 시진핑은 첫 만남에서 미녀를 앞에 두고도 “노래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나요?”라며 딱딱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잘 나가는 가수였던 그녀는 “수입이 얼마나 되나요?”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시진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해 외동딸 시밍쩌를 낳았다. 시밍쩌는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로 재직 중이던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항저우외국어학교에 수학하다 아버지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이어 2009년 8월 저장대 외국어학원에 입학했고, 2010년 9월 학기에 미국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펑리위안은 현재 인민해방군 가무단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계급은 장성급인 소장이다. 시진핑은 평소 아내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아내가 동반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여겨 국빈급 외국방문 때도 아내를 동행하지 않는 철저한 ‘내외유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주] 

저작권자 © 위클리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