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총리 존재감 없자 허태열에 힘 실려

▲ 정홍원 총리(왼쪽)와 허태열 비서실장. <사진=뉴시스>

[위클리오늘=한기주 기자] 정홍원 총리는 김용준 총리후보의 낙마로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돼 2월26일 취임식을 갖고 공식 임무를 시작했다.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국무위원은 정 총리를 비롯해 18명으로 만 69세의 정 총리가 최고령자다.

하지만 관가에서는 ‘실세 국무위원’으로 유정복 안전행정부장관과 진영 보건복지부장관, 현오석 경제부총리,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을 꼽는 이들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총리’를 약속했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평가다. 정 총리는 과연 책임총리일까?
 
민감한 질문에는 “모른다” 답변
지난달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진행된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 현장에 정홍원 국무총리가 섰다. 하지만 이날 대정부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총리로서 ‘책임있는 답변’은 찾기 어려웠다. 정 총리는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백년전쟁> 동영상에 대해서는 “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고 넘어갔다. 질문하는 의원 입장에서는 “조금 보긴 봤다”라고 해야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텐테 김이 빠지는 대답이었다.
 
유승우 새누리당 의원이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 ‘김창균 칼럼’을 봤느냐?”고 묻자 “미처 못 봤다”며 빠져나갔다. 정 총리는 그밖에 논란이 될 만한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심도 있게 연구하겠다” “부처 간 협의로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 보겠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자 국회 주변에서 이같은 답변 방식을 일컬어 ‘정홍원 스타일’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쏙쏙 빠져나가는 정 총리의 뱀장어같은 답변 스타일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 총리도 야권의 ‘정치 9단’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 박 의원은 “소통이 없으니 엇박자가 나고 있다. 대통령과 통일부 장관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할 때 총리는 대화제의는 상황악화라고 했다. 이게 엇박자 아니냐”고 힐난했다. 이른바 ‘엇박자 총리’라는 말의 배경이 됐던 그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총리는 “말한 내용이 일부만 전해졌다. 오해다. 엇박자라고 하는 것은 과한 말씀 같다”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정 총리의 ‘항변’은 거기까지였다.
 
내각 대신해 사과하는 방패막이 총리
박지원 의원이 “비서실과 내각도 대통령 앞에서 ‘NO’라고 못한다. 윤진숙 해수부 장관에 대해 어떤 건의를 했느냐, 인사제청권이 총리에게도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눴느냐”고 정 총리에게 물었다. 이에 정 총리는 “이야기를 나눴지만 인사에 대해 구체적 내용을 말씀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박 의원이 박근혜정부의 인사 참사에 대해 거듭 사과를 요구하자, 결국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는 “다소 국민들이 보기에 미흡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사 원칙이 능력과 적성을 고려하다 보니 지역 안배에서 다소 수치상 소홀한 점이 있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정 총리는 이에 앞서 24일 추가경정예산안 편성과 관련,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서도 “지난해 예산 편성 및 확정 과정에서 국회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미흡한 경제예측과 세입전망으로 추경을 편성하게 돼 국민께 송구스럽다”고 공식 사과했다. 새 정부의 총리는 책임총리가 아니라 대통령과 내각을 대신해 사과하거나 방패막이 구실을 하는 ‘사과총리’라는 세간의 속설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69세 고령에 세종시~ 서울 오가며 체력전
정홍원 국무총리의 존재감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도 총리에 대해서 는 서슴없이 날을 새운다. 지난달 22일 새누리당 대전시당(위원장 박성효 의원)은 “국무총리는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공무원으로, 세종시에 위치한 총리실에서 업무를 보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다”는 논평을 냈다. 세종시로 내려온 국무조정실(옛 국무총리실)이 정부서울청사에 사실상 재입주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자 대전시당이 발끈해 논평을 낸 것이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세종시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서울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정부서울청사가 분주해졌다는 언론 보도가 나자 새누리당 대전시당이 즉각적으로 논평을 낸 것이지만 정 총리로서는 내심 서운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정 총리는 취임 이후 거의 날마다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 총리는 지난달 30일 오전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 3-187번지에 입주한 ‘정부세종청사’ 4층 국무회의실 화상회의장에서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영상국무회의를 열었다. 이어 오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아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 말 중기중앙회를 방문해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것처럼 ‘중소기업 총리’가 돼 낮은 곳에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다가가겠다”며 중소기업인들을 다독였다. 저녁에는 중소기업인들을 위한 만찬에 참석했다. 칠순 나이에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며 겪는 체력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간의 시선이 야속할 정도다.
 
성대 동문 허태열 비서실장은 존재감 과시
정 총리가 대통령과 내각을 적극 방어하는 방패막이 총리 역할을 하는 반면 2인자의 또다른 축을 이루는 허태열(68) 대통령비서실장은 청와대내에서 점점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다는 평가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지난달 17일 저녁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를 청와대 인근 비서실장 공관으로 초청해 만찬 회동을 가졌다. 청와대에서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박흥렬 경호실장 및 9 명의 수석비서관들이, 새누리당에선 이한구 원내대표와 김기현 원내수석부대표 등 원내대표단 10여명이 참석한 ‘실세’들의 회동이었다.
 
이날 회동은 청와대 비서진과 여당 원내지도부 간 ‘당청 소통’을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고 한다. 와인을 곁들여 2시간 남짓 진행된 만찬에서는 정국현안이 심도있게 논의됐고, 당내 현안을 놓고도 두루 의견 조율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근래 출입기자들과도 간담회를 갖고 경색된 남북관계가 박근혜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풀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등 ‘실세’ 다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정 총리와 허 비서실장은 박근혜정부의 실세 학맥인 성균관대 동문이다. 허태열 비서실장(법학과), 유민봉 국정기획수석(행정학과), 곽상도 민정수석(법학과), 이남기 홍보수석(신문방송학과)이 성대 졸업자인데, 대부분 청와대에 포진해 있다. 내각은 정 총리(법학과)와 황교안 법무장관(법학과) 뿐이다. ‘왕비서실장’이라는 말이 나돌만큼 허 실장이 비서실을 장악했다는 평이다. 책임총리 역할을 할 수 없는 정홍원 총리의 지금 현실은 총리의 운명을 ‘대통령을 잘 보좌하는 것’으로 규정한 정 총리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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