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무라 사토시 <사진=뉴시스 제공>

[위클리오늘=임영서 기자] "미생물 덕분입니다."

올해 노벨 의학생리학상 공동 수상자 3명 중 한 명인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大村智, 80)의 소감이다.

노벨상 수상이 확정된 5일 저녁, 그는 현재 명예교수로 있는 도쿄(東京) 기타사토(北里)대학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벨상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고 아사히(朝日)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전했다.

오후 8시30분께 오무라는 제자들의 박수갈채 속에 회견장에 등장했다. 100명이상의 보도진 앞에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등장해 머리를 숙였다.

"아침에 나갈 때는 오후 4시께 귀가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스웨덴에서 전화가 왔다"고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돼 전화를 받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 "내 일은 미생물의 힘을 빌렸을 뿐. 나 자신이 잘난 것을 생각해내거나 한 것이 아니다. 미생물이 하는 일을 공부해 오늘까지 온 것"이라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오무라는 젊은 학생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를 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3배의 실패를 한다"며 "실패를 반복해도,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젊은이들을 격려했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오무라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농촌에서 뛰어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야마나시(山梨)현 니라사키(韮崎)시의 농가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가축을 돌보는 등 집안일을 도왔다.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의 동생인 타이조(泰三, 75)는 "우리 형제는 놀기만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책상은 먼지로 덮일 정도였다"며 형이 공부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에 가도 좋다"는 아버지의 말에 야마나시 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현지에서 교편을 잡고 싶었으나, 그 해에는 교직 모집이 없어서 도쿄(東京) 스미다(墨田) 공업 고등학교 야간부 교사가 됐다. 그것이 그를 연구자의 길로 인도했다고 오무라는 회상했다.

"인근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뛰어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기말 고사에 들어온 한 학생의 손에 기름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렇게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도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회고했다.

학생들의 배우려는 자세에 감동을 받아 도쿄교육대(당시)의 연구생에 이어 도쿄 이과(理科)대학 대학원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야마나시대 조교수를 거쳐서 키타사토(北里)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꿈을 좇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36세의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돌아와도 연구비를 지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해 그는 직접 발품을 팔며 연구비를 조달했다.

그는 미국 제약회사들을 돌면서 연구비를 모았다. 당시 개발한 것이 구충제인 `아베르멕틴(avermectin)'이다. 이 개발로 얻은 특허료 등 200억엔이상은 키타사토 연구소에 기부했다.

오무라의 어머니는 교사로 바빴기 때문에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하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오무라는 농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로부터 근면함을 배웠다. 교사인 어머니는 누에를 치며 그 과정을 공책에 필기했는데, 그런 모습에서 과학자의 마음을 배웠다고 밝혔다.

그의 관심 분야는 다양하다. 여자미술대학 이사장도 맡을 정도로 미술품 수집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약 5억엔을 들여서 모은 그림으로 "니라사키 오무라 미술관"을 그가 나고 자란 니라사키시에 설립했다. 그는 미술관을 나라사키시에 기증했으며, 공공시설에도 작품을 대여하고 있다. "젠체하지 말고, 예술을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술관 옆에는 온천과 국수집을 열기도 했다.

야마나시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해 초중고교생의 교육에도 힘쓰는 등 차세대 육성에도 힘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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