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오늘=임종호 기자] 남북당국회담이 이른바 수석대표 ‘격(格)’을 놓고 대립하던 끝에 무산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양측은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며 날선공방을 벌이고 있다. 남북 당국자회담 결렬의 가장 큰 원인은 북한의 진실성 없는 태도에 있다. 북측은 “통일부 장관의 격에 맞는 대표단장을 파견해 달라”는 우리 정부의 애초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측 수석대표로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선정해 통보하자, 장관급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담에 응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선정했다. 북한은 조평통의 부위원장급도 아니고 그 하위직책인 서기국장을 우리의 장관과 같은 급 인사라고 주장했다.

이번 회담 성사 결렬은 남북이 모처럼 대치에서 대화로 국면 전환을 모색하던 중 서로 상황을 주도하기 위한 기싸움의 결과라는 점에서 당분간 대화가 재개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6년 만에 재개될 고위급 회담으로 개성공단 정상화, 금강산 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 등 ‘3대 현안’에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회담이 물거품이 되면서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은 다시 절망감에 휩싸이게 됐다. 진보와 보수 성향 시민단체들도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민사회단체들은 남북대화는 재개돼야 한다는 데에는 공통된 바람을 표시하고 있다. 남북당국자회담 무산은 이처럼 단순한 남북의 일시적 대화단절을 넘어 큰 실망감과 함께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수정제의는 없고, 판문점 연락채널은 끊기고

통일부는 남북당국회담 무산과 관련해 북한에 수정 제의를 하지 않기로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에 회담을 위한 수정제의를 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대표단과 북한의 대표단이 변한 게 없다면 언제든지 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며 “북한이 성의 있는 입장 변화를 보여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우리측 통일부 차관과 북한의 조평통 서기국 국장 간 회담은 북한이 수용만 한다면 열릴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남북 간 판문점 연락채널은 다시 끊겼다. 우리측 판문점 연락관은 지난 12일 오전 9시와 오후 4시 북측 연락관에게 시험통화를 시도했지만 북측은 두 차례 모두 전화를 받지 않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이 오늘 오전 9시 업무개시 통화는 물론 오후 4시 마감 통화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3월11일 북한의 일방적인 단절 통보로 끊겼다가 남북회담 재개합의로 지난 7일 3개월 만에 정상화된 판문점 연락채널이 다시 끊어진 것이다. 북한이 판문점 연락채널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회담 무산에 대한 후속 조치로 해석된다. 판문점 연락채널이 언제 다시 재가동될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이 판문점 연락채널의 단절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남북 간 연락채널이 전혀 없는 상태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책임 떠넘기지 말고 진정성 있는 대화에 나서라”

남북당국회담이 결렬되면서 진보와 보수 성향 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다양한 반응을 내놨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통해 “남북은 회담 무산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지 말고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하라”고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남북당국회담 ‘격’에 대한 논쟁이 대화에 대한 진정성 공방으로 불거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기도 전에 상대방의 의도를 섣불리 재단하고 진정성을 의심하는 행태는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온 국민이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관계 회복에 기대를 걸었던 남북대화를 기약할 수 없게 돼 유감”이라며 “남북 모두 형식과 체면이 아닌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도 성명을 통해 “남북 모두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실련 통일협회는 “남북당국회담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킨 북한의 책임은 분명하다”며 “그러나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압박을 통해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내려한 박근혜 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성공단 문제를 비롯해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당장 하루가 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며 “박근혜 정부에 요구되는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관계 개선이지 격식이나 형식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북한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라”

미래를여는청년포럼과 북한인권학생연대 등 보수성향의 4개 단체는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은 진정성 있는 태도로 남북회담에 다시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북한은 우리 정부가 요구한 김양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도 아니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보다 하위 직책인 서기국 국장을 내세웠다”며 “그럼에도 우리측 인사의 격을 따져 일방적으로 회담을 무산한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은 진정성 있는 태도로 다시 남북당국회담에 나서야 한다”며 “주요 의제에 한반도 비핵화도 포함시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자유청년연합, 대한민국지킴이연대 등 6개 단체는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 없이 남북당국회담을 열어서는 안된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들 단체는 “국군 포로·납북자 송환 문제와 천안함·연평도 사태 등이 우선 협상 대상이 돼야 북한과의 신뢰프로세스가 이어질 수 있다”며 “이번 남북당국회담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들, “실낱같은 희망에서 다시 절망으로”

남북당국자 회담이 무산되면서 가장 큰 실망감을 느낀 이들은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다.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 비상대책위원회는 남북회담 무산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설비점검 인력의 방북 허가를 촉구했다.

비대위는 “남북회담을 통해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기대하던 개성공단 입주기업인들은 회담이 무산됨에 따라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북한 당국은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위해 당국자 회담에 조속히 임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개성공단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기계설비 점검이 시급하다”며 “설비점검팀이 즉시 방문할 수 있도록 통신 연결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다.

개성공단이 잠정폐쇄된 지 70일이 지나면서 남북회담까지 막판에 무산되자 입주기업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다. 다시 공단 작업이 정상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재가동 준비를 하던 업체들은 장마에 설비가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학권 개성공단입주기업협회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이제는 바이어들도 모두 떠나가 개성공단이 재개된다고 해도 다시 거래를 할지 의문”이라며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협의해 바이어들과 거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토로했다. 또 “개성공단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생각이 있다면 설비점검팀만이라도 상주토록 해 정상화되면 바로 공장이 가동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들은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는 정부에 대한 서운함도 토로했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부회장은 “우리 기업인들은 그동안 정부의 지침에 따라왔고 철수 명령에 따라 철수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며 “양쪽이 격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도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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