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위클리오늘] 장지수 기자= 항일여성운동가 백신애는 경북 영천군 태생(1908년생)으로 대구·경북 최초의 여류작가다. 백신애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영천에서 18일 개최됐다.

영천시의 후원으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경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이 공동 주관을 맡았다.

경북도와 개발원은 이날 오후 영천시 교육문화센터 공연장에서 ‘항일여성운동가, 백신애의 삶과 문학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작가 백신애의 재조명에 나섰다.

이번 영천 심포지엄에는 김영석 영천시장, 한혜련 도의원, 이원경 경북도여성가족정책관, 경북 도 내 시장·군수 가족을 비롯해 우애자 사랑의열매 경북단장, 이춘자 영천시여성단체협의회장, 시·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단 등 경북의 여성리더, 영천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날 영천시새마을부녀합창단(단장 이순자)과 정은송 이화여대 교수의 축하공연으로 심포지엄의 서막을 열고 백신애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물 상영에 참석자들은 “백신애의 인생 그림자를 새삼 깊이 있게 느꼈다”고 말했다.

김영석 영천시장은 이날 개회식 환영사에서 “대구·경북 최초의 여류작가 백신애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민초들의 삶을 사실감 있게 그리면서 문학을 통해 여성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면서 “근대 여성사와 문단사에 큰 영향을 끼친 찬란한 불꽃같은 이야기를 통해 창작의 행보를 되새겨 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윤순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도“‘여성들이여 무지와 몽매에서 깨어나라’고 외친 백신애의 시베리아 여행은 그를 저항문학으로 이끌었다”면서 “1939년 만31세로 요절하기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백신애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에 여러분을 모시게 돼 감회가 깊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원경 경북도여성가족정책관은 “문학가이자 계몽운동가이고 교육가인 백신애 선생의 삶을 영천에서 재조명하게 돼 더욱 반갑다”고 말했다.

심포지엄 첫 순서로 김창우 경북대 명예교수의 ‘순이야, 울지 말고 일어서라’는 백신애 초혼 굿 연극(‘도도 연극과 교육 연구소’, 대표 이현순)이 공연됐다. 백신애의 혼을 불러내 그 혼과 함께 퍼포먼스를 곁들인 이 극은 1934년 6월 《신여성》을 통해 발표된 그의 유일한 시 ‘붉은 신호등’이다.

기조 강연에는 단국대 장유정 교수가 ‘근대 대중가요,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하다’는 주제로 진행됐다. 장 교수는 ‘근대 대중가요와 음악’, ‘근대 대중가요와 문학’, ‘근대 대중가요 산업과 매체’, ‘근대 대중가요와 여성’이라는 소주제로 나누어 강연했다.

본격 심포지엄은 오후 4시께 시작됐다. ▲심포지엄의 좌장은 영천 영동중학교 백현국 선생이 맡았으며 서영인 문학평론가가 제1주제 ‘여성운동가 백신애(항일운동가, 사회운동가, 계몽운동가)’를 ▲제2주제 ‘여성작가 백신애의 문학세계(나의 어머니, 꺼래이, 적빈, 채색교 등 문학작품 소개)’는 김용락 경운대 교수 ▲제3주제 ‘백신애의 생애(백신애 시베리아 방랑과 일본유학 시절)’는 시인이자 민중운동가인 이중기 선생이 각각 맡았다.

이중기 시인은 「백신애, 그 홀림길을 따라가다」, 「백신애 연구」(구모룡 엮음, 도서출판 전망, 2011년) 등의 저서가 있으며 백신애기념사업회를 세운 장본인으로 백신애 연구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 시인 이중기 선생이 정리한 [백신애 연보]

- 1908년(1세): 5월20일 경북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 68번지에서 아버지 백내유와 어머니 이내동의 1남1녀 중 둘째로 출생
- 1913년(6세): 글을 배우기 시작해 천자문을 뗌
- 1918년(11세): 이모부 김 씨를 독선생으로 두고 한학을 배우며 영천향교에서 수학
- 1919년(12세): 5월1일 영천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 학적부 이름은 무잠(武潛). 이때부터 호적 이름과 학적부 이름은 한 번도 일치하지 않음. 가을에 소학 한 권을 다 외웠음.
- 1920년(13세): 9월1일 대구 신명여학교(현 종로초등학교)로 전학. 학적부 이름 신애, 출생연도가 1907년으로 돼 있다.
- 1921년(14세) 10월 신명여학교 중퇴. 학적부는 중퇴 이유를 ‘건강’이라고 적고 있음. 이후 백신애는 어떤 글이나 자필이력서에서조차 신명여학교에 다닌 사실을 언급하지 않음.
- 1922년(15세): 12월1일 영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학. 학적부 이름은 술동(戌東). 학적부와 졸업대장은 있어도 졸업사진에는 백신애가 없다. 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필이력서에는 학적부와 달리 1923년 3월1일 입학, 3월25일 졸업, 4월1일 경북도립사법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돼있다.
- 1923년(16세): 3월18일 이름 술동(戌東), 출생연도 1906년으로 호적을 정정. 영천공립보통학교 수업연한 4년 과정 졸업. 당시 남학생을 6년제, 여학생을 4년제 임. 경북도립사범학교(1년 강습과)에 입학.
- 1924년(17세): 경북도립사범학교 졸업. 경북도립사범학교 출신 여성교사 1호로 모교인 영천공립보통학교에 부임. 이 무렵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고 영천에서 비밀리에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 1925년(18세): 경산 자인공립보통학교로 전근.
- 1926년(19세): 1월5일 조선여성동우회와 문화소년회가 주최한 서울 청진동 회중교회 강연회에서 어머니와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생활 개선’을 주제로 강연을 함. 이날 《신여성》의 주간 소파 방정환도 함께 강연했다. 1월10일 조선여성동우회 간친회에서 감상담 발표 사실이 《시대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사실이 학교와 당국에 알려져 권고사직을 당함. 2월20일 천도회관에서 경성여자청년동맹 1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허가를 받아내고 대회를 성사시킴. 3월3일 제2회 정기총회를 통하여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을 선출됨. 7월 인천 병인청년회 주최 학술강연회에서 강연하게 돼 있었으나 연사가 요주의 인물이란 이유로 금지됨. 8월14일 시흥군 부면 노량진청년회 주최로 ‘여성해방과 경제조건’을 주제로 강연하고, 16일 파일청년회가 주최한 남녀 정사(情死) 비판 강연회에서 ‘정사는 자본주의 산물’이라는 주제 강연을 마지막으로 1927년 10월28일까지 신문 지상에서 사라짐. 6월 오빠 백기호가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영천에서 검거돼 종로경찰서로 압송됨.
- 1927년(20세): 10월 오빠 백기호가 사임한 영천청년동맹 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됨. 11월7일 영천청년동맹 주최 ‘러시아 혁명 기념강연회’에서 강연을 했고, 11월14일 경동선 연안에 산재한 각 신문·잡지기자 조직인 경동기자동맹 ‘제3회 경동기자대회’를 조양각 누상에 개최 시 서기로 지명됨.
- 1928년(21세): 1월 신간회 영천지회 정치문화 상무, 영천청년동맹회관에 차린 여자야학 교사, 5월 근우회 영천지회 설립준비위원으로 임시의장을 맡아 6월2일 근우회 영천지회 설립, 7월 영천청년동맹 벽(壁)신문 편집책임자, 7월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
- 1929년(22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필명 박계화)가 1등 당선.
- 1930(23세): 경산군 안심면 용계동으로 이사.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배우가 됨.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순보》(1930. 4. 21) 363호에 의하면 백신애는 ‘조성희’라는 예명으로 ‘일본키네마제작주식회사’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키네마순보》(1930. 5. 11) 365호에는 일본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작품 「모던 마담」에 출연한 스틸사진과 그 이름이 보인다. 일본키네마는 「모던 마담」 제작 후 파산했기 때문에 백신애의 배우활동은 「모던 마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해에 일본대학 예술과에 다녔다고 하지만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1931년(24세): 아버지 백내유가 대구 달성로에 견직물 공장과 달성공원 앞에 삼화제면공장을 세움(이 건물은 훗날 이병철이 사들여 삼성상회가 된다).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귀국했으나 결혼 강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 식모, 세탁부 같은 일을 하면서 삼월회, 근우회 동경지회에도 관여했다.
- 1932년(25세): 가을에 귀국, 이근채와 약혼.
- 1933년(26세): 3월17일 대구 공회당에서 이근채와 현대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 규슈와 일광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옴.
- 1934년(27세): 단편 「꺼래이」를 《신여성》 1월호와 2, 3월 합본호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함. 4월 《신가정》이 주최해 조양회관에서 열린 ‘대구여성좌담회’에 참석함. 6월 《신여성》에 생전에 쓴 단 한 편의 시 「붉은 신호등」을 발표했다. 7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 판에 산문 「인테리 여성의 집」을 발표(4~6일). 11월 《개벽》 속간호에 「적빈」을 발표함.
- 1935년(28세): 《소년중앙》 1월호에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를 발표했다. 《소년중앙》 4~7월호까지 장편 소년소설 「푸른 하늘」을 연재했으나 2회와 3회분이 수록된 잡지가 존재하지 않아 작품은 찾을 수 없다. 12월 병 치료와 온천요양을 위해 규슈로 간 아버지 백내유가 사망해 규슈대학병원으로 감.
- 1936년(29세): 1월 《삼천리》 주최 여류작가 좌담에서 참석했으나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고 박화성과 두 사람은 기념촬영도 하지 않았다. 4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 판 ‘반도여류작가집’에 「악부자」가 번역되어 6회에 걸쳐 소개됨. 10월9일 「꺼래이」를 개작했다(『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에 수록). 12월 반야월 괴전 마을에 과수원과 새집을 지어 이사하고 손수 농사도 지음.
- 1937년(30세): 4월 대구에서 동인지 《문원》이 발간됐는데 창간호가 존재하지 않아 백신애도 여기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월에 펴낸 2집에 산문 「초화」를 발표한다. 동인은 신삼수, 이윤기, 정명헌, 김학준, 함성운, 손원도, 최병문 등 문학청년들이었다.
- 1938년(31세): 1월 『현대조선문학전집』에 개작한 「적빈」이 수록됨. 5월 남편과 별거, 친정으로 돌아오면서 8월까지 단편소설 「광인수기」, 「소독부」, 「일여인」을 연이어 발표한다. 9월25일 위장병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한다.
- 1939년(32세): 1월 「채색교」를 개작하고 「식인」을 「호도」로 개작해 수록한 『여류단편걸작집』이 발간되고 서울로 감. 3월 노천명 시인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라듐치료를 받았다. 이때 시인 백석과 평론가 백철을 만나 기생집도 드나들며 피를 토하면서까지 술을 마셨다. 만신창이가 돼버린 이때 「어느 유언초」(《매일신보》)를 발표했다. 4월 「봄 햇살을 맞으며」,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청도기행」, 「혼명에서」를 써내자 백석과 백철이 들고 가 자신이 근무하는 《여성》과 《조광》, 《국민신보》에 발표해 주었다. 5월 말경에 병이 악화되어 경성제국대학병원 13호실에 입원했으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6월23일 오후 5시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당일 화장을 하고 서울 어느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산 40번지 중산골에 있는 친정 가족묘지 아버지 옆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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