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정선 논설위원

[위클리오늘=소정선 논설위원] 인문학 연구의 백미로 꼽히는 ‘죄수의 딜레마’는 자유방임의 모순과 이타성의 필요성을 지적한 결론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타성을 유발하는 상호규정성, 혹은 관계성의 중요성을 입증한 연구라는 점을 사람들은 종종 잊고 있다.

다음 사례를 보자.

범죄 공모자로 의심받는 죄수 A와 B가 체포, 서로 격리되어 있어 경찰의 취조에 대해 상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두 죄수가 모두 범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면 증거 불충분으로 각각 징역 2년을 받고 그 중 하나가 또 다른 한 사람을 연루시키며 입을 열면 그 죄수는 즉각 석방되지만 나머지 1명은 5년의 징역에 처해진다.

두 사람 모두 자백할 경우 정상 참작으로 둘 다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 

이 상황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딜레마란 죄수들이 과연 자백할 것인지의 여부이다. 자기 이익을 고려하는 A죄수의 계산은 “B죄수가 자백하면 나 또한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다. 나는 5년이 아닌 4년 징역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B죄수가 자백하지 않을 경우에도 "나는 자백하는 것이 좋다. 자백하지 않으면 2년 형을 살고 자백하면 즉각 석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따로 취조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자백 여부는 다른 죄수의 자백과 하등 관계가 없다. 즉, 나의 선택은 상대방의 선택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경우에도 내겐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B죄수 또한 동일한 추론 과정을 거쳐 A죄수와 동일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죄수가 모두 이기적이라면 그들은 자백(배신)을 할 것이며, 4년을 감옥에서 살 것이다. 만약 의사결정 기준에서 상대를 고려한, 이타적 선택(서로협조)을 했다면 그들은 징역 2년으로 그칠 수도 있었다. 

이해 여부의 관점에서 본다면 둘 다 이타성을 발휘하는 것이 정답이다. 내 이익만 챙기면 결국 둘 다 손해를 본다. ‘죄수의 딜레마’는 ‘내게 좋은 일을 남에게도 하라, 즉 내가 작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타인에게 배풀면 모두 이익이다’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게임과정에 주목하면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내 선택, 내 이익이 상대의 결정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표에서 A죄수가 협조를 선택해도 B죄수가 협조, 배신을 선택함에 따라 A죄수의 형기는 0과 4년이라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나는 가만있는데 상대 움직임이 나를 좌우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 ‘내 선택이 내것이 아니고 타인의 선택에 따라 내 것이 결정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지난해 합격점수를 보고 충분하다고 생각해 경쟁률 낮은 과를 지원했는데 다른 많은 학생들도 똑 같이 지원함에 따라 경쟁률이 치솟아 낙방한 입시생의 사례이다.

대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 5자, 4자, 양자대결이냐에 따라 특정후보의 지지율이 달라진다. 나는 변함없는데 타인의 사퇴와 진입에 따라 내 지지율이 널뛰기 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해서 노력한 내 인생의 결과가 사실상 타인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극단적 결론도 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철학자의 명언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사람은 혼자 살수 없다. 우리 모두는 관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 받는 차원을 떠나 내 삶을 타인이 결정하는것이고, 타인의 삶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북한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한국 주가를 뒤흔들고, 미 대통령 트럼프의 선택이 그 다음날 내 식탁의 반찬에도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일단 이해 손실의 관점에서 죄수 딜레마의 주인공들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서로 신뢰하고 협조하면 서로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협조할 수 없는 상황이 딜레마이다.그런데 그 이익이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안이라면 어떻게 될까? 공멸을 알면서도 그렇게 선택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선택을 회피하고 모두의 이익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가상적 상황의 모의실험을 진행한 공동자원 딜레마 사례가 그 해답을 준다.

남녀 자원자들에게 각각 집단을 구성하고, 이 집단들에게 아래 네 조건 중 한 조건에서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몫으로 취하고자 하는 자원의 양을 적어내도록 했다. 여기서 150은 그 공동체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는 자원사용 한계치이다.

실험조건에서 ▲ 의사소통 가능 조건은 구성원 간 의사소통 허용한 것이며 ▲ 의사소통 불가능 조건은 구성원 간 의사소통을 불허한 것이다.

 

그 결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경우 자원사용량이 그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가능 한계치인 150을 훨씬 밑돈 반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는 자원 다소에 관계없이 한계치를 넘어서 그 사회는 발전이 멈추게 된다. 결국 의사소통이 없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죄수 딜레마’에서도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면 양자가 서로의 이익, 나아가서는 전체사회의 이익을 공동으로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면 A,B 죄수 모두 ‘서로 협조’을 선택해 형량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 서로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개인의 이익은 물론 사회적 이익을 높이는 요인은 바로 의사소통인 것이다.

최근 대선에서 각 후보들의 경합이 진행되면서 대두된 ‘대연정’, ‘대통합’ 의제도 결국은 각 이해집단과 정당간의 소통을 활발하게 해서 국정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에 다름 아니다. 민주당 경선 후보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언으로 촉발된 ‘대통합’은 이제 각 당의 모든 후보들이 인정하는 대세로 정착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의 핵문제를 둘러싼 이해당사자간의 대립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죄수 딜레마’의 최악 선택을 연상케 한다.

정치전문가들은 북한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립을 ‘다혈질 비호감 정치인’ 트럼프 미국대통령과 ‘예측 불허 젊은 독재자’김정은의 기싸움, 치킨게임에 비유한다. 남북한의 공멸이 뻔히 보이는 현실에서도 양자는 현재까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이익을 떠나 세상의 모든 사안과 이익은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관계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북한과 미국은 ‘서로가 사라져야할 상대가 아니라 상대가 있음으로써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호 규정적 상대’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SNS상에 떠다니는 ‘한반도 전쟁’은 ‘죄수 딜레마’의 게임논리로 본다면 양자 모두 가장 불리한 선택을 하는 상황이다.

‘내게 좋은 일을 남에게도 하라, 내가 작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타인에게 배풀면 모두 이익이다’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남한과 미국을, 미국과 남한은 북한을 배려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자가 비난전만 할 것이 아니라 터놓고 의사소통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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