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 <사진=뉴시스>

20년째 '통상임금 범위' 명확한 규정 없어...신의성실이 원칙이 최대 쟁점?

정기상여금 통상임금 포함, "노동자도 맞고 기업도 맞다"...분쟁 키우는 법원

[위클리오늘=김성현기자] 산업계가 통상임금 소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법원이 ‘신의성실 원칙’이라는 애매모호한 조건을 적용해 사안별, 법원별로 제각각의 판단을 내놓는 게 혼란의 주 원인이다.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한다는 노동계의 입장을 인정하면서도, 기업 경영에 어려움을 끼칠 경우는 예외라는 애매한 판결이 오히려 노사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통상임금은 퇴직금과 야근수당 등 각종 수당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실정법에서는 개괄적인 개념설명만 있을 뿐 통상임금의 포함 범위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정이 없다.

임금은 노-사 양측 모두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데, 그 많고 적음이 판사의 성향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6조는 '통상임금이란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所定)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하여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 금액, 일급 금액, 주급 금액, 월급 금액 또는 도급 금액을 말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통상임금의 구체적인 범위를 정하는 법령이나 위임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1997년 근로기준법이 전면 개정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신의칙이라는 이름하에 법원의 자의적인 해석에만 근로자와 기업의 운명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당장 8월 말에 열릴 예정인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신의칙'이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약 3조원의 임금이 걸린 대규모 소송의 향배가 사실상 법관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는 '신의칙'에 의해 결정될 상황인 것이다. 

◆ 강행규정보다 상도의가 우선?

지난 2013년 12월 18일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여부를 둔 대법원의 전원일치 판결이 있었다.

당시 갑을오토텍이라는 기업의 노동조합원은 회사를 상대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연장근로수당을 계산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노조측의 손을 들어줬으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현재까지 노사 갈등의 원인이 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정기상여금에 대해 정기성·고정성·일률성이 있다면 통상임금에 속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임금이 기업의 지급능력을 초과하는 등의 예외적인 상황에 있어서는 신의칙의 위배로 보고 법정수당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즉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따라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지만 근로자가 이를 근거로 추가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 제56조는 ‘사용자(기업)는 연장근로와 야간근로 또는 휴일근로에 대하여는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하여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범위에 따라 잔업수당, 퇴직금 등이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당시 재판부는 ▲국내 대부분의 기업에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힌 점 ▲기업의 존립기반에 영향을 주면서까지 임금을 인상할 수 없는 점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법정수당 청구가 신의칙 위반임을 밝혔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 제2조 1항에 규정된 것으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민법 뿐 아니라 사실상 국내 법 전체에 적용되는 원칙적인 규범이다.

이 같은 판결에 대해 대법관 중 일부는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으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는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해당 판결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근로자와 기업간의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신의칙 위반의 해석이 갈리기 때문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줄소송이 이어졌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부분에 집중하고, 기업은 신의칙을 위반한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노사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종업원 450인 이상 기업 중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인 기업은 35개에 달하며, 건수로는 총 103건이다. 

가장 최근 판결인 금호타이어의 통상임금 2심 재판에서도 신의칙이 적용됐다.

8월 18일 광주고법 민사1부(재판장 구회근)는 금호타이어 노조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1심의 판결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노조측은 2013년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각종 수당을 다시 계산해 1인당 미지급금 3800만원을 추가로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국내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임금협상 시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고 이러한 합의는 관행으로 정착했다"며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될 경우 금호타이어에 예측하지 못한 재정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 역시 통상임금은 인정하나 신의칙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법원의 애매한 판결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변호사는 “신의칙이란 법리대로 판결을 하자니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때나 쓰는 말이다. 법리로는 맞지만 상도의상 아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법원이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신의칙을 남발해서 판결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후폭풍이 거세다고 피하기보다는 차라리 명확한 판결을 내리는 게 미래를 봤을 때 더 좋았을 것”이라며 “통상임금처럼 명확한 위임규정이 없을 경우에는 대법원의 판결이 거의 법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는 법리를 억지로 무시하면서까지 기업의 사정을 봐주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판단을 ‘신의 한 수’라고 판단하는 입장도 있다.

통상임금의 범위는 근로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해석하면서도 기업의 대규모 지출은 막았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비록 노사갈등은 더욱 깊어졌지만 당장의 상황만 보면 양측이 모두 만족할만 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8월 22일 오후 서울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 노동자 총집결 투쟁대회를 하고 있다. 노조는 기본급 15만 4800원 인상과 영업이익의 30% 성과급,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는 것 등 11개 별도 사안을 요구했다. <사진=뉴시스>

◆노동계·산업계엔 어떤 영향이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여부는 단순한 임금 인상의 수준을 넘어 연봉체계 자체를 뒤집을 수 있다.

임금채권의 시효기간은 3년으로 기업입장에서는 패소와 함께 과거의 각종 수당 등을 새로운 통상임금을 적용해 지급해야 한다.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책정된 퇴직금 역시 추가로 지급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정기 연봉협상을 상회하는 연봉인상 효과를 볼 수 있으며, 그 동안의 잔업수당에 대해 추가적인 임금을 받아낼 수 있게 된다.

8월말 1심 선고를 앞둔 기아차는 패소와 함께 약 3조1000억원의 충당금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기아차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인 7870억원의 4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기아차는 1심 재판에서 경영악화 등을 통상임금 인상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주장했다.

특히 최근 대중국을 상대로 한 글로벌 사업이 사드 등의 영향으로 인해 사실상 차입경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등의 경영악화 상황을 강조했다. 

본사 직원들의 통상임금 인상이 결과적으로 협력 부품업체의들의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기아차 관계자는 “기아가 대기업이니 통상임금 인상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근 경영이 악화되고 중국 판매도 60% 가까이 급감했다. 당장 패소 판결을 받으면 충당금으로 3조원을 써야한다”며 “일부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소송을 ‘로또소송’이라고도 한다. 이기면 대박, 져도 아무런 리스크가 없다는 것이다. 또 기아차의 패소가 산업계 전반의 줄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여파로 인해 재계 서열 2위 현대차그룹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업계에서 대두되고 있다.

기아차의 위기상황은 곧 완성차, 자재, 부품, 물류 등으로 수직계열화된 현대차그룹에 영향을 미쳐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같은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한국지엠(GM)의 경우는 한국사업 철수까지 언급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노동계측은 그 동안 기업이 비정상적인 통상임금으로 노동착취를 해왔다는 주장이다.

또 일부 재벌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은 갈수록 쌓여가는데 통상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죽는 소리를 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그 동안 기업들은 인력이 부족해도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기존 노동자의 근로를 초과시켜 이윤을 유지해왔다. 신규채용보다 초과 근로가 더 저렴하게 먹히기 때문”이라며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도 고용시장을 위협하는 기업을 위한 판결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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