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의 모습. <사진=뉴시스>

[위클리오늘=김성현기자] 대법원의 29일 삼성전자 LCD공장 산업재해 인정 판결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서 "산재 판결에서 혁명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피해 노동자의 질병 원인에 대한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사실상 회사쪽으로 돌리는 판결을 하면서 유사한 사례에서 노동자들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대폭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산재 사건에서 질병의 원인이 화학물질 등 회사의 근무환경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피해자인 노동자가 입증해야 했다.

하지만 회사가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관련 자료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노동자로서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삼성전자 LCD 사건에서도 피해 노동자가 질병 발병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는데, 대법원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회사측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 혁명적 판결, 노동자 구제의 시작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9일 삼성 LCD공장 근로자였던 이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이씨에게 발병한 희귀질병이 삼성 LCD공장이 원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에도 삼성이 영업비밀을 이유로 이를 입증하지 않았다는 것이 판결의 핵심 내용이다.

원고의 입증책임을 기업에 넘긴 것이다.

2002년 11월부터 2007년 2월까지 약 4년 3개월간 LCD 모듈 검사과에서 ‘판넬 화질 검사원’을 근무한 이씨는 손 발이 저리고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나 퇴사를 결정했다.

퇴사 후에도 마비 증세는 계속됐고 오른쪽 시력까지 잃었다.

병원을 찾은 이씨는 2008년 6월 희귀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게 된다.

이씨측은 해당 질병이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고 1·2심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원고의 업무로 상병이 발병했다거나 기존 질환이 자연적인 진행 경과를 넘어서 급격하게 악화됐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씨측은 삼성 LCD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다며 삼성측에 유해물질 정보 공개를 요구했으나 삼성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삼성의 이같은 대응은 역설적으로 이씨가 대법원에서 승소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대법원은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한 역학 조사의 한계점과 함께 영업비밀을 이유로 유해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삼성측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유해물질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씨가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게 되면 충분히 병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 "사법부 인식 혁명적 전환"...소비자 피해에도 활용될 듯

이 같은 판단은 혁명적인 판결로 평가된다. 기업과 달리 재해에 대한 입증 능력이 부족한 소비자, 노동자들에 대한 입증책임을 완화함과 동시에 약자에 대한 구제력을 높였다는 것이다.

소비자시민모임의 백대용 변호사는 “정말 의미있는 판결이다. 사법부가 피해자들의 억울함에 대한 인식을 혁명적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실 일반인이 산업재해나 기업으로 인한 사고를 전문적인 방법으로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며 “특별한 환경에 노출됐을 경우 입증을 기업이 하게 만든 것으로 이번 판례를 시작으로 노동자, 소비자들의 억울함이 해소될 일이 많을 것이다. 이런 판결들이 많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산업계의 산재 소송을 넘어 소비자 집단 피해 사건 등에도 영향을 미칠것으로 분석된다.

단순히 노동자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입증책임 자체를 사실상 회사측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경우, 당초 법원이 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더욱 빠르게 됐을 것이다.

자동차 급발진 등의 경우도 피해자가 기계적 오류를 입증해야 하지만 전문성이 낮은 개인이 이를 입증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국내법은 명시적으로는 영미법계와 달리 ‘판례법’을 인정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기가 어려워 하급심 판결에 사실상 구속력을 가진다.

백대용 변호사는 “일반적으로는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소비자에게 입증책임이 있는 것이 당연시 돼 왔는데 법원이 굉장한 인식의 전환을 한 것”이라며 “이를 근거로 여러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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