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왼쪽에서 3번째)이 지난 1월23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현장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뉴시스

[위클리오늘=오경선 기자] 국내 가상화폐(암호화폐)거래소 5위 업체인 ‘코인네스트’의 김익환 대표가 고객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검찰에 체포돼 파문이 이는 가운데 정부가 투기근절 목적으로 도입한 가상화폐 거래실명제가 오히려 거래소의 범법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초 제도 시행이후 은행들이 신규 가상계좌 발급에 뒷짐을 지자 중소거래소들이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우회 수단으로 법인계좌의 자(子) 계좌 형태인 '벌집계좌'를 편법 운영하면서 범죄 창구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거래소들이 탈법형 가상계좌를 운영해온 사실을 알면서도 금융당국은 방조·조장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5일 서울남부지검은 김익환 코인네스트 대표 등 중소형 가상화폐 거래소 2곳의 임직원 4명을 사기, 횡령, 상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검찰은 이들이 고객의 자금을 거래소 대표나 임원 명의 계좌로 빼돌린 것으로 보고 있다.

가상화폐거래소 대표가 체포된 것은 처음으로, 횡령·사기 혐의 액수는 수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세거래소 사업자가 거액의 투자금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벌집계좌’ 형태로 고객 자금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벌집계좌는 거래소가 영업을 위해 필요한 법인계좌를 거래 은행부터 발급받아 그 아래에 개인 투자자들의 계좌를 두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일종의 법인계좌의 자(子) 계좌인데, 법인계좌에 1번부터 100만번까지 일련번호를 줘 특정인 명의의 계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시중은행이 가상화폐 거래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지난해 7~12월 중에 가상계좌 신규 발급을 중단하자, 후발 거래소들은 일반 법인계좌를 발급받은 뒤 이 계좌 아래에 거래자의 계좌를 일렬종대로 묶는 편법을 동원했다.

거래소는 개별 투자자들의 주민등록증 사본 등을 통한 본인확인 후 계좌 인증 절차를 거친 후 법인계좌 아래에 개인 투자자들의 계좌를 연결한다.

개인투자자들이 연결된 계좌에 입금을 하면, 사이트 내에서 가상화폐를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 표시된다. 통상적으로 10분 가량 걸린다. 거래소 직원이 수동으로 입금액을 확인하고 거래 가능한 금액을 입력하기 때문이다. 새벽 시간대에는 근무 인원에 따라 이 시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

직원이 수동으로 입력하는 장부는 주로 파일 형태로 이뤄져 있어 거래자 수가 증가하거나 감시체계가 소홀할 경우 오류가 날 가능성이 높고 해킹에도 취약하다.

거래소 사업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객 돈에 손을 댈수 있는 구조다.

반면 은행이 발급하는 실명계좌를 이용하면 거래소 운영자가 투자자의 개인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위험성이 훨씬 줄어든다.

개인투자자가 은행 입출금통장을 거래소에 등록하면 거래소는 개인에게 가상계좌를 발급한다. 개인의 은행계좌와 가상계좌가 1대 1로 매칭돼 투자자의 실명확인이 가능해진다. 또한 투자자의 입금액이 자동으로 전송, 기입돼 직원이 수기로 입력해야 하는 법인계좌보다 위조 및 오류 가능성이 낮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지난 1월말부터 가상화폐 거래소 고객이 실명확인 절차를 거친 뒤 발급받는 새로운 가상계좌를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를 시행했다.

그럼에도 벌집계좌가 묵시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은 은행이 실명계좌를 신규 발급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거래소가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상화폐거래소에 대한 신규 계좌 개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안은 없다”고 말했다. 당국이 신규계좌 발급을 제지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분위기 상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에 30여개가 넘는 거래소가 운영 및 준비 중이지만 은행의 실명확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곳은 업비트, 빗썸, 코빗, 코인원 등 4곳에 불과하다. 은행권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중소거래소들이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블록체인협회가 파악한 협회 거래소 회원사 중 가상계좌가 아닌 법인계좌를 사용하고 있는 거래소의 회원 가입자 수는 지난 1월 23일 기준 76만여명에 달한다.

업계 관계자는 "개별회사가 자정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 운영을 위한 필요한 시스템이 구축되는 환경이 선행돼야 한다”며 “거래실명제가 시행된 이후 몇몇 영세한 거래소는 입금은 막아놓고 출금만 시행하고 있다. 사실상 문 닫고 있는 과정”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금융당국이 투기를 막기 위해 실명제를 시행하고, 벌집계좌 개설은 전면 금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거래량이 많은 거대 거래소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라며 “법인계좌를 통한 거래소 운영이 지금은 암묵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언제 금융당국의 한마디로 사업을 중단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신규계좌 발급 길이 막히면서 외국계 거래소도 한국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계 거래소인 후오비코리아는 지난달 30일 국내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입금 계좌 문제로 원화마켓은 오픈하지 못했다.

후오비코리아 관계자는 “실명계좌를 발급받기 위해 여러 은행과 접촉 중에 있지만 구체적으로 원화마켓 오픈 일시를 예측하긴 어렵다”며 “법인계좌를 이용한 서비스 운영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투자자 리스크 등을 고려해 기왕이면 실명계좌 발급 방향으로 진행하려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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