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어야 했던 존재"

성철 큰스님(1912~1993)의 유일한 혈육인 딸 불필 스님(75)이 아버지이자 스승인 성철 큰스님을 돌아봤다. 큰스님이 열반에 든 지 20년이 가까이 흘러 펴낸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통해서다. 불필 스님은 그간 여러 차례 회고록 집필을 청탁 받았지만 계속 거절했다. 산 속에 사는 선승이 책을 내는 일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다 결국 김영사 박은주 대표(55)의 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큰스님 탄신 100주년인 2012년을 맞이해 큰스님의 법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석남사 대중과 참되게 수행해온 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눠달라는 거듭된 부탁에 응했다. 스님은 지난 동안거 기간 펜을 들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글을 썼고, 가을로 접어든 9월 18일 책으로 내놓게 됐다.

▲ “아, 나는 금생의 중이 아니라 전생부터 참선하던 중이었구나…. 영원한 행복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사진=뉴시스]

      속세의 딸로 태어났지만 큰스님은 아버지  아닌 스승
     "다음 생애 다시 태어나 큰스님 상좌가 돼  시봉하고 싶다"

불필 스님은 <영원에서…>에서 큰스님에 이어 불가에 들어서게 된 사연, 일제에도 굽히지 않은 완고한 유학자였던 조부, 유가의 남편과 불가의 아들 사이에서 늘 노심초사하면서도 아들의 영원한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던 조모, 큰스님과 자신을 뒤따라 50대에 역시 불제자가 된 어머니 일휴 스님 등 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를 잔잔하게 풀어놓고 있다.

또한 향곡 법전 인홍 스님 같은 ‘선지식’(지혜와 덕망이 있고 사람들을 교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승려)들의 철저한 수행과 성자 같은 삶, 성철과 청담(1902~1971)이라는 훗날 조계종의 큰 어른이 되는 스님들이 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된 1947년 봉암사 3년 결사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국불교 100년사 등을 8개 장에 걸쳐 나눠 담았다. 

스님이 소장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큰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들도 실려 있다. 과거에 가필된 형태로 발표된 큰스님의 친필 법문 노트를 원문 그대로 담아 불교 사료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증도가’, ‘신심명’, ‘토굴가’ 등 여러 자료들은 초심자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지침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경남 합천 해인사 금강굴에서 만난 스님은 속인들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불필 스님은 “회고록을 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계속 거절을 했지만 큰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큰스님께 올리는 글을 써보자는 제안마저 물리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스님은 1937년 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큰스님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1957년 석남사에서 인홍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 바로 전 해인 1956년 당시엔 경남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임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인텔리 비구니로서 속가와 불가를 이으며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오히려 세상을 멀리해 왔다.

▲ 큰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해 성철 큰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딸 불필스님이 회고록을 펴냈다.

      "미친 도인이 되려 했다"

스님은 그간의 은거자에 가까운 삶에 대해 “성철 큰스님을 속세의 아버지가 아니라 불가의 스승으로 모시게 됐을 때 큰 스님께서 ‘도인 중에는 숨어 사는 도인이 있고, 미친 도인이 있는데 어느 도인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숨어 사는 도인이 되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낸다. 그러나 미친 도인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때 나는 미친 도인이 돼 심산유곡에서 감자나 캐먹는 생활을 하겠다고 큰스님께 마음으로 약속했다. 나는 못난 중으로서 세상에 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런 것 저런 것 떠나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불필 스님은 자신이 태중에 있던 1936년 무심하게 출가한 뒤 집을 한 번도 찾지 않은 큰스님을 그토록 원망하면서도 승려의 길을 따라 걷게 됐다. 스님은 “사범학교 시절 큰스님을 두 번째 대면하던 때에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는데 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겠느냐’는 물음을 들은 뒤 ‘나는 영원한 행복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이때부터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었다”고 전했다.

자신을 끔찍할 정도로 아껴 부친의 부재를 느끼지 않게 해준 다섯 살 위 언니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홉 살 때 느낀 정신적 충격, 서울 혜화초등학교 재학 중 6·25전쟁을 겪으면서 본 수많은 죽음들이 자신을 불제자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했다.

“도경 언니의 죽음을 겪은 뒤 어려서부터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했다. 단언하건대 나는 수많은 생을 큰스님의 회상(會上)에서 수행자로 살아왔을 것이다. 절에 와서 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아, 나는 금생의 중이 아니라 전생부터 참선하던 중이었구나’였다. 난생 처음 큰스님을 만나러 다녀온 이듬해 6·25가 터졌다. 그때 또 한 번 생과 사에 관해 느끼면서 내면의 불성을 깨달았다. ‘이번 생에 도를 깨치지 않으면 어느 생에 이 몸을 계도하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출가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스님은 속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 큰스님이 1982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내놓은 법어이자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말씀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손꼽았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돼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공간을 초월해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돼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돼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 유일한 혈육인 딸 불필스님이 아버지이자 스승인 성철 큰스님을 돌아봤다. ‘부녀’가 함께 자리한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 [사진=뉴시스]

       "큰스님은 내게 스승일 뿐"

스님은 “큰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이 법어로 시비를 세워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못 세운 시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책 말미에 그 말씀을 적어 봤다”면서 “자기를 바로 본다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도 바르게 돌아갈 것이다”고 짚었다.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나는 큰스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영결식과 연화대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다비식 날 늦은 오후에야 금강굴 위 다비장에서 사그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해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이었다. 나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큰스님의 상좌가 돼 시봉하고 싶다.”   
 [뉴시스]
 

저작권자 © 위클리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