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발' 은 있다? 없다?

미국인들은 남자로 태어나 한 번 해볼 만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오케스트라 지휘자, 해군 제독과 함께 프로야구 감독을 꼽는다고 한다. 특히 프로야구 감독 자리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동경의 대상 그 자체다. 하지만 최근 국내 프로팀 사령탑들의 모습을 보면 빛나기만 하는 자리는 아니다. 

얼마 전 프로야구 넥센의 김시진 감독이 전격 경질됨으로써 2010년부터 지금까지 8개 구단의 감독이 새 얼굴로 바뀌었다. 2년 만에 8개 구단의 감독이 새로 바뀐 것은 프로야구 30년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감독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다. 

성적이 저조하다 싶으면 계약기간 불문하고 자진사퇴 형식을 빌려 감독을 교체하는 게 새 트렌드가 돼 버렸다. 계약기간은 무의미한 숫자일 뿐, 감독 자리를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 상황은 국내 프로축구팀 감독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 성적에 울고 웃는 프로 감독들.

     구단과 주위 압박으로 지휘봉 놓아     

    감독 3년 이상 자리 지킨 구단은 3개뿐

‘그라운드의 신사’로 불리던 김시진 감독이 지난 9월 중순 전격 경질되면서 프로 야구판은 뒤숭숭해졌다. 2년 동안에 프로야구팀을 이끌던 8명의 사령탑이 모두 퇴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올 시즌에만 두 번째 중도퇴진이다. 지난 8월엔 한대화 한화 감독이 자진사퇴 형식을 빌려 물러난 바 있다.

     탈모·소화불량·불면증

프로팀 감독들은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다. 흰머리와 탈모, 소화불량, 불면증을 아예 끼고 산다. 단기간에 성적을 내야 한다는 조급증과 프런트의 입김 때문이다. 상당수의 구단은 감독에게 수억 원대의 연봉을 안기면서 당장 성적을 내라며 사지로 내몰고 있다. 구단의 이런 행태는 잔혹한 처방이 독보다 약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야구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구단의 이런 방식의 대응이 프로팀의 목표인 ‘좋은 성적을 통한 기업 이미지 제고와 수익 창출’에 기여할지 의문이다.

팀 성적에 대해 감독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넥센과 한화는 당장 좋은 성적을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선수층이 부족해 몇 년을 두고 ‘리빌딩’에 나서야 했다. 당장 스타급 선수 몇 명 채운다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음에도 감독에게 전적인 책임을 물리는 것은 무리다. 

두 구단의 프런트는 성적과 리빌딩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감독 경질’이란 카드를 택했다. 시즌 도중 팀을 위해 애쓰고 있는 감독을 경질한 처사는 구단에 득이 될 리 없다. 감독의 단명은 팀에 독이 될 뿐이다. 당장 구단 이미지에도 타격이 작지 않다. 한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구단이 인내심을 갖고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할 이유다. 자리보전에 연연해 당장의 성적에 집착하면서 구단의 눈치나 보는 감독을 원하는가. 당장은 이익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손해다. 지휘체계에 영이 서지 않으면 팀 내 계파가 생기는 등 갈등이 야기된다. 

성적의 책임을 물어 감독 경질을 일삼는 팀은 국내는 물론 메이저리그 등에서도 하위권을 전전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각 구단은 1983년부터 18년간 해태 감독을 맡아 한국시리즈를 무려 9번이나 제패했던 김응룡 전 삼성 사장, 1996년부터 11년 동안 현대를 이끌었던 김재박 KBO 경기운영위원, 1995년부터 9년 동안 두산을 지휘한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 등의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감독 생명이 파리 목숨인 현실에서는 결코 명장이 탄생할 수 없다. 좋은 감독 배출 없이 좋은 선수가 발굴될 리가 없다. 걸핏하면 감독이 잘리는 현실은 은퇴를 앞두고 지도자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좌절감만 깊게 할 뿐이다. 어렵사리 프로 구단 지도자로 낙점되더라도 언제 잘릴지를 걱정한다면 그들에게 과연 무슨 희망이 있을까. 

야구를 잘하고 싶은 선수들에게 기술과 경험을 전수할 수 있는 장이 줄어든다면, 그들이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한국 야구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팀의 체질개선과 리빌딩을 통해 좋은 성적을 내려면 적어도 5년 정도 비전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감독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게 야구원로들의 충고다.
 
     잦은 ‘자진사퇴’의 비밀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인 것은 프로축구도 마찬가지다. 프로축구 K-리그 16개 구단 가운데 3년 이상 감독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단은 단 3개뿐이다. 2010년 시즌부터 지금까지 현대를 이끌고 있는 김호곤 감독, 제주 유나이티드 박경훈 감독, 성남 일화 신태용 감독뿐이다. 나머지 13개 구단은 전부 감독이 바뀌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며 명예롭게 물러난 최강희, 조광래 두 감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진 사퇴’를 명분으로 그만뒀다. 실제로는 구단이나 주위에서 사퇴하도록 압박해 지휘봉을 놓도록 한 게 속사정이다. 

올 시즌에 물러난 감독만 해도 3명이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허정무 전 감독, 전남 드래곤즈의 정해성 전 감독, 강원FC의 김상호 전 감독 등 모두 스플릿 하위 B그룹으로 떨어진 팀의 감독들이었다. 지난해엔 K리그의 ‘명가’ FC서울이 황보관 감독을 J리그에서 영입한 지 5개월 만에 경질하기도 했다.

성적 부진은 사퇴로 직결된다. 김호곤 감독, 박경훈 감독, 신태용 감독은 나름대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김호곤 감독은 부임 첫해인 2009년에는 정규리그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했지만 2010년, 2011년 시즌에는 각각 4위, 2위로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작년에는 리그컵대회에서 우승했다. 

박 감독은 2009년 취임 후 팀 체질을 확 바꿨다. 대대적으로 선수를 보강하고, 패싱 위주로 팀 컬러를 바꾸며 2010년에는 준우승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엔 9위를 기록했지만 올 시즌은 상위리그인 A그룹에 진입했다. 

신 감독의 성남은 부진으로 하위리그인 B그룹에 떨어졌지만 2010년에는 정규리그 5위를 기록했고 아시아챔피언을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부진한 성적에도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선전했다. 올 시즌 인천은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했지만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을 맴돌았다. 결국 허정무 전 감독이 지휘봉을 놓았고, 팀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았다. 인천은 김봉길 감독이 부임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전남과 강원은 여전히 강등 위기에 몰려 있다. 감독 자른다고 팀 성적이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로야구 두산의 모범사례

성적부진에 따른 감독 경질이 대세인 야구판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는 팀이 두산이다. 두산은 김인식 감독에게 94년 시즌을 마친 뒤부터 2003시즌까지 9년간 팀을 믿고 맡겼다.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던 당시 OB(두산 전신)는 ‘만년 꼴찌’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 감독이 부임한 95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은 OB를 유력한 꼴찌 후보로 손꼽았다. 94시즌 말 선수단 항명사태가 일어나는 등 팀 내 분위기가 흉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감독을 만난 OB는 달라졌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OB는 원년(1982년) 이후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정상에 입맞춤했다.

2001년 한 차례 더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김인식 감독은 2003 시즌을 마친 뒤 후배인 김경문 감독에게 지휘봉을 물려줬다. 김인식 감독 체제에서 자리가 잡힌 두산은 꼼꼼한 스타일의 김경문 감독을 만나 더욱 탄탄해졌다. 김경문 감독은 재임기간 동안 한국시리즈에 3번 진출해 모두 고배를 마셨지만 8년 동안 두산을 이끌었다. 요즘 프로구단들의 태도라면 ‘3차례 한국시리즈 진출’보다, ‘3차례 우승 도전 실패’를 문제 삼아 경질했을 법하다.

두산 역시 성적이 최우선이라는 점에선 여느 프로구단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인화’를 모토로 내건 모그룹의 분위기 때문에 감독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한국시리즈에 올라 우승하지 못했다고 해서 감독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두산만의 끈끈한 팀 컬러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구단은 만족했다. 김경문 감독의 경우 2011시즌을 치르는 도중 자신이 생각하던 야구가 나오지 않자 갑작스럽게 자진사퇴를 선언한 경우다. 그때도 구단은 김 감독에게 “팀을 계속 이끌어 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었다.

감독 교체 횟수도 두산이 가장 적다. 현재 팀을 이끌고 있는 두산 출신의 김진욱 감독은 8대 감독이다. 롯데 양승호 감독이 14대, 삼성 류중일 감독이 13대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감독이 교체되지 않았는지 비교가 가능하다. 두산은 ‘뚝심의 야구’ ‘끈질긴 야구’ 등 확실한 팀 컬러를 만들어내며 이제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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