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 포스터

[위클리오늘=이주현 기자] 지난달 말 개봉한 재난영화 ‘엑시트’가 연일 화제다. 억지 눈물을 유도하는 신파나 치명적인 민폐 캐릭터, 두 남녀 주인공 사이의 애정행각 하나 없다. 기존의 재난영화와 다른 양상에 두 배우의 찰떡 연기력까지 더해져 영화는 흥행에 불을 지폈지만, 한편에선 캐릭터와 스토리가 너무 평면적이란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이 영화에는 적절하지 않다. ‘엑시트’는 인물과 이야기의 입체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영화다.

평화롭던 ‘국제신도시’에 갑작스레 유독가스가 퍼진다. ‘구름정원’에서 팔순잔치를 치르던 ‘용남’ 가족은 건물에 고립될 위기에 처한다. 구조되려면 옥상에 올라가야 하지만, 옥상 문이 잠겨 그럴 수 없다. 용남은 산악동호회 경험을 살려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맨손으로 벽을 오른다. 첫 번째 구조 기회 때, 용남과 의주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순서를 양보한다. 겨우 얻은 두 번째 기회 때도 학원에 갇힌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구하도록 한다. ‘의주’는 모두가 혼돈에 빠졌을 때 혼자 건물의 비상벨을 누르고 다른 손님들을 대피시키기도 했다.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선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재난영화의 경우엔 더 그렇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 다른 이를 구하려 달려드는 주인공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용남과 의주에 대한 사전 설명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의 희생정신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의주는 구조헬기를 떠나보낸 뒤 뒤돌아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죽기 싫다며 오열도 하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다.

이 영화에는 또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여러 방법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휴대폰 라이트로 SOS 신호를 보내기(‘따따따 따 따 따 따따따’)나 부상자를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간의 침상 만들기, 방독면 사용하기, 뿌연 연기 속에서 길 찾기 등은 평범한 시민이라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특별한 이들의 재난 극복 감동 스토리’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보여주는 재난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방안’이다. 이미 벌어진 일보다는 문제해결에 초점을 뒀다.

비극에는 언제나 카타르시스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연성을 포기하더라도 비극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용납하진 않는다. 도로에 널려 있을 주검을 보여주지 않거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큰누나가 끝까지 살아있는 설정 등이 그렇다. 재난 속에 벌어지는 비극적 죽음과 절망을 관객들과 분리시켜 감정적 극단효과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현시대를 관통하는 트라우마인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신을 삽입하면서도 관객의 죄책감이나 고통을 양분삼지 않는 것과, 대재앙처럼 보이던 유독가스가 한순간 아무 일도 없던 듯 사라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거리두기’는 ‘드론’의 등장으로 더욱 잘 드러난다. 용남과 의주가 숨 가쁘게 도망치는 모습이 ‘드론’의 중계로 유튜브와 TV 등에 생방송된다. 용남의 가족은 물론 그들과 일고의 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크린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고 또 응원한다. 관객은 스크린 속의 다른 관객을 발견하고, 일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을 잃고 그들과의 거리를 두게 된다. 긴박한 전개에 순식간에 다시 스크린 속에 빨려 들지만 비극에 대한 완전한 몰입은 결국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배우의 연기력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비극을 대하는 감독의 윤리적 태도에 있다. 수많은 비극이 범람하는 오늘날, 이상근 감독의 앵글에 관객이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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