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진주시 남강 위에 형형색색 불을 밝힌 유등이 띄워져 있다. 매년 10월이면 진주성과 촉석루 인근 남강 일원에선 '남강 유등 축제'가 열린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7만여 진주백성의 충절 혼을 기리기 위해 시작됐다.  <사진=뉴시스>

[진주=위클리오늘] 전혜은 기자= 최근 과거사 문제로 여러 분야에서 한일 간 대립이 첨예한 가운데 1592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한 곳인 ‘진주성 대첩’과 경남 진주시의 '남강 유등 축제’가 주목받고 있다.

매년 진주성과 남강 일원에서 열리는 ‘진주 남강 유등 축제’의 유래는 약 430년 전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호남 곡창지역을 거쳐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던 진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포위하고 진주성 뺏기 위해 밤낮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임진년(1592년) 10월6일 3만이 넘는 왜군과 조선 관군 3800명 간 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진주목사로 있던 김시민과 관군, 의병(義兵), 승군(僧軍)을 비롯한 민·관·군은 호남의 진격로에 있던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마다않고 항전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 조선군과 백성은 10월11일까지 5일 동안 이어진 총 10회의 전투에서 왜군에게 완승하며 진주성을 지켜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 측 피해도 있었으나 왜군은 사망자만 1만 명에 달했고 결국 왜군은 참패한 뒤 퇴각했다.

바로 이 전투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성 대첩’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 6월 진주성 앞에 9만3000명 규모의 왜군이 다시 몰려왔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병력이 12만여 명임을 감안하면 호남 곡창지대 길목에 위치한 진주성의 당시 전략적 가치는 왜군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 진주성 2차 전투 때 조선군 규모는 대략 관군 3000명과 의병 2800명에 불과해 17대 1로 싸워야 하는 독에 든 신세였다.

1차 전투에서 대패한 왜군은 최대한 병력을 동원, 진주성으로 집결시켰고 수적으로 말도 안 되는 교전이 하루에도 수차례씩 치열하게 이어졌다.

8박9일 동안 총 24회에 걸친 교전이 있었으나 매번 김시민 목사가 이끄는 관군·백성들의 단결로 수성전(守城戰)은 조선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2차 전투가 벌어진지 9일째 되던 날 폭우로 인해 무너진 동쪽 성벽으로 왜군이 물밀 듯 밀려들면서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진주성에 진입한 왜군은 7만 명에 달하는 진주백성과 관군을 무참히 학살해 진주성은 이내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다.

비록 성벽 붕괴로 왜군에 패하기는 했으나 왜군 전사자도 3만8000명에 달한 만큼 일각에선 2차 진주성 전투는 앞선 1차 전투였던 ‘진주성 대첩’이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진주성을 함락하긴 했으나 주력군 중 3할을 잃은 왜군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어난 의병과 충무공의 반격 등으로 결국 부산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2차 진주성 전투는 왜군에게 치명타가 됐고 결국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진주백성과 관군, 의병이 합세해 이 땅을 지켜낸 셈이다.

경남 진주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숨져간 충절의 혼을 달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남강에 유등을 띄우고 소망등을 달고 있다.

올해 ‘진주 남강 유등 축제’는 10월1일부터 13일까지 진주성과 남강 일원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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