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위클리오늘=이주현 영화기자> 꾸준하다. 이렇게까지 꾸준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괴물>(2006), <설국열차>(2009), <옥자>(2017)에 이어 <기생충>(2019)에서도 봉준호는 관객을 괴롭힌다. 계급 간의 차이를 명징하게 그려낸 직설적인 표현과 잔인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허탈이 남는다. <기생충>은 그 허탈의 정점에 있는 영화다.

봉 감독의 영화에서 그의 전작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괴물>은 그의 영화에 특히 자주 등장한다. <옥자>에서 미란도 그룹 CEO 낸시가 호수에 독극물을 부었던 행위는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출이 원인이었던 <괴물>의 탄생을 떠오르게 한다. 또 기택의 집에 쏟아지는 소독 가스는 괴물에 뿌려지던 방역 가스를 연상시킨다. 저택을 탈출한 기택 가족이 폭우 속을 달리는 모습은 괴물을 찾기 위해 한강 둔치를 수색하던 강두 가족과 맥을 같이 한다. 무엇보다 저택의 지하는 ‘괴물의 뱃속’이나 ‘현서가 갇힌 깊고 어두운 하수구’를 연상시킨다.

<괴물>에서 현서는 괴수에게 납치당해 하수구에 갇힌다. 강두는 현서의 생존을 확신하고 가족과 함께 추적에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현서를 구출하지만 이미 죽은 그녀를 괴수의 뱃속에서 꺼내는 것이 성공인지는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한다. 하지만 ‘꺼내는’ 행위만큼은 성공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로 ‘숙주’를 말한다. 딸의 주검을 안은 아버지는 13년이 지난 지금, 기생충이 되어 괴물 같은 저택 지하로 향한다. 이제 그를 꺼내려 하는 것은 기택의 아들, 기우다.

기우는 네 명의 가족 중 유일하게 상상할 줄 안다. 네 번이나 떨어진 대학 시험에 붙을 수 있고 신분을 속인 채 부잣집 딸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빈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다 "여기 살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엔 황홀한 표정으로 해답을 떠올리려 하기도 한다. "상징적이네요"란 말을 반복하던 그는 모든 사건을 겪고 뇌수술을 마친 후에야 ‘본질적인 문제’가 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우는 부자가 돼 저택을 사고 지하에서 아버지를 꺼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관객은 기우의 이런 계획이 실패할 것임을 직감한다. 영화 내내 반복되던 ‘계획’과 ‘무계획’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이 "이 시대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계급 상승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기택의 상상이 실패로 끝날 것을 암시하며 종결된다.

괴물은 죽었다. 설국열차는 부서졌다. 옥자는 돌아왔다. 기생충은 죽거나 살아남았다. 그러나 괴물은 또다시 탄생할 수 있다. 미란도 그룹도 망하지 않았다. 가장 극적 혁명을 보인 <설국열차>마저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구체적인 가능성이나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저택에서의 살인 후 홀연히 사라진 기택은 “이렇게도 살아지나”라던 그곳에 다시 등장한다. ‘사라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이 단순한 말장난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비극의 순환을 목격하게 된다. 봉 감독이 남기는 '허탈'이 바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음’이었는지 모른다.

<기생충>은 한 걸음 더 나가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송이, 근세의 구조 요청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기우가 기택의 편지를 해석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괴물을 비롯해 설국열차와 옥자, 기생충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산물이지만, 이 적극적인 ‘달라질 수 없음’ 앞에서 <기생충>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관객이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를 읽었음에도 ‘찝찝하고 불쾌하다’는 감정에 머물게 되는 이유다.

숙주에서 시작해 기생충까지 봉 감독의 13여 년간의 영화 여정을 떠올린다.
영화 <기생충>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하고 일그러진 현 시대의 얼굴로 해석하게 되는 것은 비단 기자만의 생각일까.

'참으로 시의적절'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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