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람 구제하는 데는 속수무책

▲ 국회 청원이 제대로 처리되지도 않고, 정부에 이송한다 하더라도 강제성이 떨어져 제 구실을 못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위클리오늘=최학진 기자] 지난 1991년 제일은행(현 SC은행)의 고의부도 처리로 수십억원의 피해를 당한 박모(68)씨. 10년에 걸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 끝에 1999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은행의 고의부도를 확인한 박 씨는 제일은행의 고의부도로 피해를 당했다면서 금융감독원에 구제신청을 냈다. 그러나 금감원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증거가 없다며 금융분쟁조정 각하 결정을 내렸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특허까지 내고 회사를 멀쩡히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이 대출금에 대한 커미션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도처리하는 바람에 회사를 날리고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혔는데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다.

박씨는 1999년 청원법에 주목했다. 국회에 청원하면 국회차원에서 조사를 벌이고, 국회에서 조치를 취하면 금융감독원에서 납득할만한 결론을 도출할 것으로 판단하고 국회에 청원서를 냈다. 그러나 국회는 더욱 기가 막혔다. 국회의원의 소개 없이는 청원이 불가능했다.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대표로 활동하던 박 씨의 국방비리 고발을 눈여겨 본 한영수 의원의 도움으로 15대 국회 때 청원을 냈다. 국회는 2000년 5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자동 폐기됐다. 16,17대에도 청원을 계속했으나 모두 폐기됐다. 박 씨는 2008년 9월 문학진, 이종걸 의원의 소개로 18대 국회에 청원했다. 18대 국회에서는 청원심사소위원회가 열렸다. 2010년 6월 정무위에서는 “대책을 강구해 적의 처리 후 보고하라”는 결론이 났다. 국회가 금감원에 이를 통보하자 제일은행이 전화를 걸어와 7000만원을 줄 테니 해결하자고 했다. 억울하게 회사를 잃고 외롭게 싸운 지난 20년을 7000만원에 끝내자는 제안을 박 씨는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후 박 씨는 18대 국회에서도 청원이 폐기처분 된 사실을 알았다.

묵살되기 일쑤…국회의원 임기 끝나면 자동폐기
국회법 개정도 무산…정부 이송해도 강제성 없어

이처럼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국회 청원제도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청원 접수도 어렵고, 접수된 청원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다. 청원이 접수된 뒤에도 청원심사소위원회에서 철저한 조사·심사가 없다. 심사 결과가 도출돼도 국회의 결과가 행정부처에서 이행되지 않는다. “처리 후 보고하라”고 하면 현행법(국회법 128조5항)상 10일 이내에 보고가 이뤄져야 하나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보고하지 않는 부처에 대해 고발조치가 이뤄져야 하나 이마저도 묵살된다.

내팽개친 청원

 


헌법 제26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며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하고 있다. 공권력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 또는 국정에 관해 자신의 의견이나 희망을 국가·입법기관에 진술할 수 있는 권리다. 중앙부처나 공기업, 지자체 등 정부기관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은 국회청원을 통해 억울함을 구제받도록 한 법률이다. 재판청구권(제27조)보다 앞서는 국민 기본권이다.

그러나 청원의 형식과 내용이 합당하더라도 심사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18대 국회 청원 처리 통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8대 때는 272건의 청원을 접수해 69건을 처리했다. 25%를 조금 넘는 처리율이다. 그나마 채택된 건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 개정’ ‘장애인의 지하철 이동편의 개선’ ‘호국 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 3건에 불과했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국회 회기가 끝나면 자동 폐기되도록 규정한 법률에 의해 자동 폐기된 건수는 무려 203건에 달한다는 점이다. 접수된 청원의 75%가 명확한 결론 없이 묻혀 버린 셈이다.

청원 넣기도 하늘의 별따기

입법기관인 국회에 청원을 넣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국회법 제123조1항에 따라 1인 이상의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입법 기관인 의원 개인이 청원에 대한 책임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과도한 민원성 청원을 막으려는 취지다. 하지만 의원과 어떻게든 연을 맺어 청원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점은 국회 청원의 장벽으로 자리한다.

청원 회부된 뒤 방치해도 해결책 없어

국회의원의 소개가 이뤄진 청원은 국회의장이 소관위원회에 회부한다. 이 청원은 소관위원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에서 조사·심사를 거쳐 폐기할지, 본회의나 위원회전체회의에 부의(附議)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위원회는 청원 회부일로부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90일 이내에 그 결과를 의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부득이한 사유로 처리가 늦어지면 기한을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는 국회청원 심사규칙 제7조다. 있으나마나한 90일 이내 보고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자동폐기 되도록 돼 있는 헌법51조다.

말하자면 소위원회 회부까지는 이행되지만, 이후에는 4년 내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청원을 내는 이들의 간절함이나 억울함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15대 때부터 18대 때까지 박 씨의 청원이 계속 폐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청원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국회의 노력도 있었다. 김우남 민주통합당 의원은 청원 심사규칙에 규정된 심사기한을 국회법으로 격상시키는 내용의 법안을 2010년 11월 대표 발의했다. 청원 처리 기한을 90일로 두고 1회에 한해 60일로 연장하는 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 역시 자동 폐기됐다. 국민의 억울함을 들으려는 귀는 너나 할 것 없이 국회의원 대부분이 닫아놓은 것이다.

청원 심사 효력 한계

청원 심사의 효력에도 한계가 있다. 국회의 청원처리 결과는 행정부를 직접 강제할 수 있는 구속력이 결여되어 실효성이 저감된다. 국회가 청원을 채택해 정부에 이송한 경우 모든 재량권은 정부에 속한다. 국회는 행정부에 적의 처리 후 보고하라고 해도 행정부가 묵살하기 일쑤다. 행정부가 10일 이내에 보고해야 하나 이를 보고하지 않아도 내버려둔다. 엄밀하게 말해 현행법 위반이고, 고발 사유임에도 국회는 이를 묵살한다. 그러는 사이 억울한 국민의 목소리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혹자는 자살하기도 하고, 혹자는 박 씨처럼 20년 넘게 홀로 싸워야 한다. 이게 자신들의 이익에만 열을 올릴 뿐 국민의 억울함에 무관심한 한심한 국회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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