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배상심의회에 배상 신청…금감원·국회·검찰 “나 몰라라”

▲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박흥식 상임대표.

[위클리오늘=신상득 기자] 한 시민단체 대표가 2012년 12월12일 국가배상심의회에 53억6000만원의 배상을 신청했다. 공무원의 과실 혹은 고의로 손해를 봤다며 국가에 배상 신청한 금액이다. 그러나 배상심의를 신청한 지 무려 4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답변이 없다. 배상신청을 받으면 조사를 거쳐 4주일 이내에 배상 여부를 결정하고 통보하도록 규정한 국가배상법 제13조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 배상심의를 신청하기까지 무려 20년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20년이나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간단하다. 정부부처가 모두 국가배상심의회처럼 신청 받은 서류에 대해 답변도 하지 않고, 묵살했기 때문이다. 헌법 제26조 청원법에는 억울한 국민이 구제받을 길을 열어두고 있지만 정부 부처든, 국회든 이를 깔아뭉개기 일쑤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을 모두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국가배상심의회가 어쩌면 그로서는 마지막 싸움인 셈이다. 이 싸움에서 지면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분신이라도 할 태세다. 20년에 걸친 외로운 싸움과 정부 부처와 국회의 무성의한 태도를 해부했다.

국가배상심의회에 신청…4개월 째 묵묵부답
검찰의 마뜩찮은 사건 수사와 기각 결정
 
국가배상심의회에 배상을 신청한 이는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박흥식(66) 상임대표다. 그는 2009년 8월28일 김형오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 27명과 전문위원 3명 등 총 30명을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고발에 포함된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직무유기, 사기 등이다. 아무리 시민단체 대표라고 해도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을 상대로 형사 고발을 하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사건은 서울남부지검 김모 검사에게 배당됐다. 김 검사는 2009년 10월27일과 12월11일 박 대표를 2차례 불러 각각 8시간, 5시간씩 진술을 받았다. 그러고는 4개월 뒤인 2010년 4월 16일 느닷없이 ‘혐의없음’이라는 수사 결과가 통보됐다.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던 그가 내막을 알게 된 것은 1년반이 지난 2012년 10월이었다. 검찰청이 수사기록 열람을 거부한 탓이었다. 결국 박 대표가 정보공개를 거부하면 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수사기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열람결과 수사기록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의 진술조서 말고는 어떤 수사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237조 2항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구술에 의한 고소 또는 고발을 받은 때에는 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고, 동법 제 257조에는 고소 또는 고발을 수리한 날로부터 3월 이내에 수사를 완료하여 공소제기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김 검사는 이 사건에 대해 7개월 보름이나 처리하지 않았다. 명백한 형사소송법 위반이다. 검찰이 고발인 진술조서만으로 피고발인이 무혐의라는 판단했다고 보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7개월 보름이나 공소제기여부를 결정하지 않았음은 검찰이 이 사건을 두고 크게 고심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국회의장 등 피고발인이 죄가 없다는 검찰 주장에 허점은 또 있다. 고발인이 국회의장 등을 상대로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검찰청에 고발하면, 즉각 무고죄로 처벌 받는다. 처벌도 무거워 10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실제로 국회의원을 상대로 고발했다가 구속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검찰은 국회의장 등 30명에 대해 고발한 박 대표를 무고로 처벌하지 않았다. 현행법을 위반했다고 국회의장 등을 고발한 경우도 드물지만, 고발 내용이 무혐의 처리됐는데 고발인을 무고로 처벌받지 않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제일은행의 고의부도와 금융감독원의 불법
“금감원 직무유기로 비롯된 53억6000만원 배상하라”
 
세상은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이 쥐락펴락하기 일쑤다. 권력과 돈을 쥔 자는 불법을 일삼아도 처벌 받지 않는다. 처벌을 받아도 약하기 그지없고, 또 금세 사면 복권된다. 그저 약자들만 고통 받을 뿐이다.
박 대표는 1991년 제일은행(현재 SC은행)에 개설한 당좌로 돌아온 어음(액면 2300만원)을 당좌 개설 통장이 아닌 다른 통장의 잔금으로 결제가 가능하였고, 이를 은행에 요청했으나 은행이 수락하지 않은 채 고의부도를 냈다. 이로 인해 박 대표의 회사가 망해 수십억원의 피해가 났다. 박 대표는 1992년과 1994년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금융감독원이 두 차례 모두 기각 또는 각하 처분했다.
박 대표는 1995년 은행과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을 벌여 1999년 4월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함으로써 은행의 어음부도 처리와 당좌거래 정지가 불법임이 확인됐다. 박 대표는 이를 근거로 1999년 6월 은행에 48억63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은행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박 대표는 1999년 8월 금융감독원에 시정명령과 담당자의 고발조치를 요구하였으나 금융감독원의 1999년 9월 다시 각하 처분했다.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제일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부도가 난 직후 박 대표에게 기술신용보증기금이 걸어온 구상권 청구 소송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구상권 청구 소송에서 1심에서 승소하고도, 2심에서 대리 변호사가 상대편 변호사에게 회유당하는 바람에 2,3심에 패소했다. 결국 박 대표는 제일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이 불가능해졌다.
 
금융감독원의 불법행위와 묵살된 국회 청원
금감원‧국회‧검찰 한결같이 “나 몰라라” 일관
 
박 대표의 피해는 제일은행의 고의 부도에 의한 것이었고, 금융감독원이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이를 구제했어야 함에도 묵살했다. 제일은행은 나 몰라라 하고, 금융감독원은 대법원 판결을 묵살하는 상황에서 박 대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헌법 제26조의 청원법 뿐이었다. 헌법 제26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부처나 공기업, 지자체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이 국회청원을 통해 억울함을 구제받도록 한 법률이다.
박 대표는 15대, 16대 국회에 청원을 하였으나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됐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되면 청원이 자동폐기 되도록 규정된 법률 때문이었다. 17대 국회에서 국회청원이 이뤄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청원구제 지시로 국회 청원심사소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소위원회는 전체 피해상황 조사, 제일은행의 불법행위 조사, 금감원의 관리부실 조사, 적절한 해결방안 모색 등의 문제해결은 하지 않은 채 금감원에 합의를 하라고 구두요청하고 끝냈다. 대법원 판결까지 묵살한 금융감독원이 국회청원심사소위원회의 소극적인 구두 합의 요청을 제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금융감독원은 제일은행에 합의를 보라고 했고, 제일은행은 7000만원을 제안했다. 수십억원 피해를 당한 박 대표가 거부해 협상은 결렬됐다. 박 대표는 소위원회가 청원법에 규정된 심사, 피해구제, 시정 및 징계요구, 청원 처리기간 90일 준수, 피해 회복 조치, 담당자 고발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국회의장을 비롯한 30명의 국회의원과 국회 정무위 전문위원, 입법조사관 등을 직무유기, 국회법 위반 등으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고발된 의원은 김형오 국회의장을 비롯해 박계동, 김영선, 유선호, 박종희, 신학용, 박상돈, 공성진, 고승덕, 권택기, 김용태, 이사철, 이성헌, 이진복, 이한구 조문환, 조윤선, 허태열, 현경병, 김동철, 박선숙, 이석현, 이성남, 조경태, 홍영표, 유원일, 신건 등이었다.
요컨대 박 대표가 이들 국회의원을 고발한 이유는 국회의원이 관련법에 의거해 금융감독원의 비리를 확인하고, 잘못이 있으면 관련법에 의해 처벌하고, 고발해야 피해를 당한 청원인이 구제를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률에 의해 철저히 해결하지 않고, 대충 금감원에 떠넘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직무를 유기한 것이고, 이로 인해 피해자의 권리행사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국민 억울함 살피는 공무원 절실
박씨 “나같은 억울한 사람 다신 없어야” 일침
 
국민의 세금을 받고 사는 공무원은 말 그대로 국가의 종복(從僕)이요 심부름꾼이다. 이는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이를 망각한 채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국회는 더욱 심각하다.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청원법은 만들어 놓고는 이를 전혀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권력을 쥔 국가의 무심함, 나몰라라 하는 방임, 책임지지 않으려는 불법적 태도로 억울한 국민의 청원은 결국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박 대표가 국가배상위원회에 제출한 배상신청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는 박 씨처럼 권력과 조직에 휘둘려 억울해 하는 사람이 생겨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 대표는 “20년간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건 다시는 나 같은 억울한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용어설명] 국가배상제도란?
국가배상법은 공무원의 고의 혹은 과실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배상받는 내용을 규정한 법률이다. 헌법 제29조는 국가배상제도를 국민의 청구권적 기본권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배상법 제2조는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할 때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가했을 때 국가의 배상책임이 발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배상법상의 배상책임 요건이 충족되면 국민은 국가배상의 청구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배상심의회의 배상지급 또는 기각 결정을 거쳐야 한다(결정전치주의). 배상심의회는 국가배상에 관하여 심의하고 결정하며 이를 신청인에게 송달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배상금 지급을 받으려면 자신의 주소지나 소재지를 관할하는 배상심의회에 배상금의 지급신청을 해야 하며, 이러한 신청을 받은 배상심의회는 4주일 이내에 배상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심의회가 배상결정을 한 때에는 그 결정이 있는 날로부터 1주일 이내에 그 결정정본을 신청인에게 송달해야 한다. 결정정본을 송달받은 신청인은 그 결정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동의서를 첨부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배상금 지급을 신청한다. 심의회의 배상결정에 국가나 지자체가 불복하면 법이 정한 기간 내에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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