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생존법 터득한 아웃사이더, 이젠 대중 속으로


김기덕 감독은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감독이지만 유독 한국 영화계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한국 관객과의 관계 역시 편치 않았다. 말 그대로 한국 영화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요, 돈키호테였다. 이런 그가 최근 SBS 예능 프로그램 <강심장>에 출연한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한때 “한국에선 더 이상 내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하기도 했던 그가 대중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달라진 행보는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통해 달라진 위상으로 연결됐다. 김기덕 감독의 ‘변신’을 두고 영화관계자들은 감독 겸 제작자인 그가 비로소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 [사진=뉴시스]

지난 11일 열린 영화 <피에타>의 제69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은 당연히 세계적인 쾌거로 축제 분위기였다. 김기덕 감독은 농담을 적절히 섞어가며 진솔한 어조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고, 주연 여배우 조민수와 티격태격하는 모습까지 선보이는 등 기자회견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다.
물론 한국 영화계를 향한 독설도 잊지 않았다. 다만 독설에 농담을 섞는 등의 방식으로 그 수위를 많이 누그러뜨렸다. 그가 가장 아쉬워한 부분은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음에도 여전히 <피에타>의 상영관과 상영회차가 상업 영화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다는 점이었다.


“안타까운 게 <피에타>를 상영하는) 극장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멀티플렉스 폐해를 주장해온 내가 두 관씩 차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한 관이라도 하루에 몇 회 정도는 상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퐁당퐁당 상영이 아닌 충분한 상영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김 감독의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투자배급사와 제작사 등 국내 극장가 전반에 대한 ‘독설’로 이어졌다.
“<피에타>는 상영관 수뿐 아니라 상영 횟수도 적다. 다른 영화는 천만 관객 기록을 세우기 위해 극장에서 나가지를 않는다. 난 그게 진짜 도둑들이 아닌가 싶다. 돈이 다가 아니지 않나. 편법과 독점, 무수한 마케팅에 아무리 착한 나도 화가 난다.”


‘50억~100억 원 단위 규모의 영화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김 감독은 거부 의사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전 세계에 배급된 뒤 전 세계적으로 투자 제안이 많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하지만 어떤 돈이든 그 돈의 가치를 객관화할 수 없다면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들은 굉장히 많이 있지만 50억이든, 100억이든, 1000억이든 큰 규모의 제작비가 드는 영화라면 그만한 가치를 보여주어야 하고, 그 투자자에게 그만한 가치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란 자신이 들 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 감독은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제작까지 하고 있다. 영화 <피에타>의 경우 제작비는 1억 2000만~3000만 원에 불과했다. 수십억 원의 투자도 거부하며 1억~2억 원의 저예산 영화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국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훈련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지금껏 메이저 제작사로부터 투자를 받은 것은 딱 한 번이다. 영화 <섬> 당시 5억 원. 그 외에는 거의 모든 영화를 일본이나 유럽 등 해외에서 투자를 받거나 해외 수익금으로 만들었다. <피에타>는 1억 2000만~3000만 원 정도가 들었고, <풍산개>도 1억 70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수백억 원이 투자된 상업 영화들이 수백만에서 1000만 관객 신화를 일궈내는 동안 김 감독은 고작 1억 2000만~3000만 원의 제작비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을 만든 셈이다. 김 감독은 이런 저예산 영화 제작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저예산) 제작이 가능한 건 내 힘이 아니다. 영화에 참여해주는 배우들과 스태프들 덕분이다. 일단 개런티가 없다.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주 열악한 상황의 스태프들에게만 한 달 생활비 정도의 개런티를 준다. 카메라도 렌즈 포함 340만 원짜리로 모두 찍었다. 나머지는 수익이 나면 나누는 구조인데 영화 <풍산개>의 극장 수입이 10억 원이었다. 거기서 5억 원을 스태프들 개런티로 나눴는데 스태프가 20~30명에 불과해 나눠보니 개인에게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더라. 그렇게 지급한 돈을 제외한 나머지도 모두 내가 갖는 것은 아니다. 다음 영화 제작에 나눠 쓴다. 앞으로 이런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싶다. <피에타>도 극장 수입이 난다면 모두 그렇게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


이런 방식을 김 감독은 ‘영화감독과 영화인들이 불평하지 않고 영화를 해 나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 지칭했다.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겸 제작자인 김 감독이 이런 시스템을 자신만의 생존법으로 터득한 것.


“이것이 앞으로 영화감독과 영화인들이 불평하지 않고 영화를 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작가가 보는 세계관과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영화들이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다른 영화들과 당당하게 경쟁을 했으면 한다. <피에타>가 그런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 김기덕 감독. [사진=뉴시스]

김 감독이 제작한 <풍산개>의 경우 제작비는 1억 7000만 원이 들었는데 국장 수입은 10억 원이나 됐다. 수백억 원을 투자해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을 버는 상업 영화에 비해 투자금 대비 수익률이 훨씬 높다. 행여 극장 흥행에 참패를 할지라도 손해 보는 제작비는 2억여 원이 채 안 되는 데 반해 상업영화는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의 투자금을 손해 보게 된다.
김 감독이 제안한 이런 시스템 역시 그 기반은 관객들에 있다. 보다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을수록 극장 수입이 늘어나고, 수입이 발생해야 개런티 없이 참여한 스태프의 몫을 챙겨줄 수 있으며 차기작 제작도 가능해진다. 김 감독이 예능 프로그램까지 출연하며 대중, 다시 말해 잠재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극장에서 영화를 걸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김 감독이 예전과 달리 여유 있는 모습으로 매스컴 앞에 섰음에도 유독 국내 극장가에 대해선 독설까지 마다하지 않은 것 역시 ‘충분한 상영 기회를 달라’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상자기사 / ‘저예산 감독’의 고가 의상 속사정

김기덕 감독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양산해 왔는데 사실 그 동안의 이미지와 대비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슈는 바로 고가 의상이다. ‘패셔니스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김 감독의 의상에 팬들의 시선이 꽂힌 까닭은 최근 공식 행사와 방송에서 늘 같은 의상만 입어서이다. 그런데 그 의상들이 상당히 고가로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지난 11일에 열린 영화 <피에타>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김 감독은 “아무도 질문 안 해주실 것 같아서 150만 원 의상의 진실을 먼저 말하겠다. 지금 입은 옷의 상의는 150만 원짜리, 바지는 60만 원짜리다”라고 밝혔다.
그리곤 이 의상에 대한 사연을 들려줬다. 김 감독은 “<이야기쇼 두드림> 녹화를 가려는데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그래서 한 시간가량 일찍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에서 내려 무작정 한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더라”며 “급한 마음에 자신 있게 옷을 골랐다. 당연히 살 것처럼 의상을 골랐는데 그땐 이 옷이 여자 옷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른 손님이 같은 의상을 보며 가격을 물어보는데 150만 원이라더라. 큰일 났다 싶었지만 녹화 시간이 임박한 데다 살 것처럼 자신 있게 고른 옷이라 그냥 사서 나왔다”고 밝혔다.
그리곤 당부의 말도 전했다. 김 감독은 “이 옷을 입고 방송 녹화를 했고 베니스 영화제 폐막식에도 섰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입은 승복을 1년 내내 입었는데, 이 옷도 앞으로 1년 동안 다른 영화제 갈 때 입어야 한다. 그런 사정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며 웃었다.
확연히 부드러워지고 여유로워진 김 감독의 달라진 모습이 의상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다.


진심 담긴 감동편지에 꽂혔다
김기덕 문재인 공개 지지 사연

김기덕 감독은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베니스 현지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를 ‘공개지지’했다. 베니스에서 국내 언론사들에게 발송한 ‘축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기덕입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평소 정치권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김 감독이기에 지지한 배경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김 감독은 이메일에서 “해외 순방 중이심에도 대통령께서 진심 어린 축전을 보내주셨고, 새누리당도 영화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메시지를 발표하셨고, 노회찬 의원님도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위원장님도 이외수 선생님도 진중권 님도 이현승 감독님도 문재인 님도 그 외에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분들까지 모두 축하해 주셨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청와대부터 여야까지 정치권을 아우르고 영화계 인사들은 물론 문화예술계 인사들 전반에 대한 폭넓은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문 후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첨부했다.
김 감독은 “그중에서 특히 진심이 가득 담긴 감동적인 긴 편지를 보내주신 문재인님의 편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건강한 수평사회를 위해 같이 노력’하시자는 말씀과 ‘연말에 아리랑을 부르고 싶다’는 말씀은 뭉클하다”며 “모든 분들이 훌륭하시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문재인 님이 고름이 가득 찬 이 시대를 가장 덜 아프게 치료하실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문 후보의 정치 철학에 동감하며 감동적인 편지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 정도로 풀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김 감독은 “저는 문재인의 국민이 되어 대한민국에 살고 싶습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대통령 후보 중 문재인을 공개 지지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지난 11일에 열린 영화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도 문 후보 관련 질문이 나왔다. 이에 “문재인 후보님과 저는 공수부대와 해병대 관계라 보면 된다. 그분은 공수부대를, 나는 해병대를 나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만나면 싸우는 치열한 경쟁관계다. 하지만 그 분과 나는 전혀 싸우고 싶지 않다”고 답한 김 감 독은 “내 인생에 배움을 주는 세 분이 있는데 이창동 감독님, 손석희 교수님, 문재인 후보님 등이다. 문 후보님이 수상 직후에 내게 축하 멘트를 주셔서, 나도 진심을 다해 답장을 했다”고 밝혔다.
공개 지지 수준을 뛰어 넘어 문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경우 캠프에 합류하는 등 선거운동까지 도울 의향이 있냐는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면서 “나는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만약 내가 그분 캠프까지 가면 내 건강하지 않은 삶 때문에 피해가 될 것 같으니 멀리서 마음으로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 김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영화 <피에타> 포스터.

김기덕 발자취

김기덕 감독은 1960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해병대를 다녀온 뒤 미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초상화 그리기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조금씩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995년 시나리오 ‘무단횡단’이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됐고 이름해인 1996년 영화 <악어>로 입봉했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인정 받아온 김 감독은 1998년 <파란 대문>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엔 <섬>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같은 해에 <실제상황>이 모스크바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2001년 작품 <수취인불명>과 <나쁜남자>가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본격적인 수상 퍼레이드는 2003년 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사마리아>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빈집>은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후 <영화는 영화다> <풍산개> 등의 영화를 직접 제작하며 영화 제작자로 변신하기도 했는데 그가 직접 감독으로 나서는 영화나 제작하는 영화는 모두 저예산 독립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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