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베일 대해부

 

[위클리오늘=신상득 전문기자] 지난 21일 대법원은 이른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김정사(58) 씨와 유성삼(59) 씨에게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1970년대 재일동포로 모국에 유학온 20대 초반의 학생들이었다. 유신정권은 1977년 이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허위자백을 통해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김 씨는 징역 10년, 유 씨는 징역 3년6월이 확정된 뒤 1979년 8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은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재건위사건, 남민전사건처럼 1970년대말 유신정권이 조작한 대표적인 간첩사건이다. 36년만에 혐의를 벗게 된 이들이지만 상처는 여전히 가슴에 남았다. 김 씨와 유 씨는 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 유신정권은 왜 이들을 간첩단으로 몰아야 했을까.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베일을 벗겨보자.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조작의 배경
6.25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의 적화 기회를 노렸다. 김신조 일당을 보내기도 하고, 간첩을 남파하기도 했다. 국가가 혼란한 틈을 타 간첩을 내려보내던 북한은 한국이 독재정권 하에서 안정되자 남파간첩을 크게 줄였다. 1975년 한옥신이 쓴 <사상범죄론>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67년까지 체포, 자수, 사살된 간첩의 수는 1429명이고 이중 1368명이 남파간첩이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남파간첩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는 사실상 간첩의 남파가 중단됐다.
북한의 남파간첩이 사라진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간첩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반대하며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을 수없이 간첩으로 만들었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잡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졌다. 국내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9호 등 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법을 만들어 잡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난 뒤 종당엔 소위 간첩단 사건들이 조작되기 시작했다.

편지 한 장으로 시작된 사건 조작
유신헌법으로 국내 체류가 어려워진 김대중 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 대학가는 맑스와 레닌 서적을 탐독하지 않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좌경화 돼 있었다. 일본 학생들이 바라볼 때 한국은 철저한 독재국가로 타도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일본에는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보다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의 세력이 훨씬 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 화학과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유영수(당시 30세) 씨는 유신정권이 민청학련사건, 김대중납치사건 등을 조작하고 긴급조치를 발표하는 등 각종 횡포를 보면서 통일이 멀어져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타깝고 아팠다.
유학 2년이 지난 1977년, 유 씨는 비장한 각오로 한통의 편지를 써서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당시 육군준장으로 육군포병학교 교장이었던 친구의 숙부를 찾아갔다. 유 씨는 편지에 “당신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암울한 남한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4·19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한다. 북한군의 고위 장성들과 협의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썼다.
사냥감을 노리던 유신정권에게 북한군의 고위 장성들과 협의해 통일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문구는 굴러든 호박이었다. 바로 보안사에 연행된 유 씨는 남산 중앙정보부로 이송돼 수십일 동안 배후를 대라며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고문기술자들은 고문을 하면서 한양대 의대로 유학온 유 씨의 친동생 성삼 씨 하숙방을 수색했다. 이곳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 한 장을 발견하고 곧바로 연행해 고문했다.
중앙정보부는 동생 유성삼 씨를 옆방에 가두고 고문하며 고문소리를 한나절 넘게 듣게 한 뒤 유영수 씨에게 준비된 시나리오 서너 개를 제시했다. 동생이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잡혀와 고문을 당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유영수 씨는 고문기술자가 제시한 시나리오 중 하나를 택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 시나리오는 유 씨를 비롯한 재일동포 학생들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하부 조직으로 엮이는 내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유성삼 씨를 앞세워 김정사(당시 21세) 씨를 연행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 씨는 1976년 스무살 때 한국에 왔다.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살다가 우리민족에 관한 교육을 받아 정체성을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모국에 유학을 온 것이었다. 77학번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지 두어 달 만인 1977년 4월21일 오전 7시30분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친구 유성삼을 데리고 낯선 사람이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보안사로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시나리오대로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져 갔다. 결국 형 유영수 씨는 20년을, 동생 유성삼 씨는 3년6월을, 김정사 씨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김정사 씨 부친은 일본에서 건설사를 경영하는 갑부였다. 김 씨 부친은 중앙정보부 김재규에게 6000만엔을 건넸다. 덕택에 김 씨 등 16명이 2년4개월만인 1979년 8월15일 풀려났다. 일본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구명운동도 한몫했다. 출소해 일본 나리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지만 아직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저녁뉴스에 크게 보도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꾸미려고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조작
유 씨 형제와 김정사 씨 등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것은 김대중 씨를 내란 음모사건의 수괴로 몰아 사형시키기 위한 법률적·사실적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란 단체가 있었다. 김대중 씨가 망명해 있을 때 일본에서 반독재, 유신체제 반대를 위해 만든 단체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의장으로 추대되기 일주일 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김대중을 한민통 의장으로 만들어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아 사형을 시킬 요량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앙정보부는 재일동포 대학생들을 한민통 산하 조직으로 연결시키고, 간첩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결국 모국에 유학온 서울대 법대 김정사, 한양대 의대 유성삼 씨는 전방견학을 하면서 탐지한 국가기밀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한민통 소속 공작원에게 전달한 혐의 등으로 체포된 것이었다.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은 혐의 만들기에 최적이었다. 일본에서는 맑스·레닌주의자가 많았고, 조총련과 민단이 인근에 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만나기만 해도 뒤집어 씌우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더구나 맑스 레닌을 읽었던 학생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서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 드러나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정리위원회를 꾸려 과거 정치적인 사건을 조사토록 했다. 조사관 김영진 씨는 조사관으로 일하던 중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담당하게 된 후 사건 조사를 위해 관련자들을 수소문하며 몇 차례 일본을 다녀왔다. 조사가 순조롭지 않았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20년 넘게 이들을 외면해 온 한국정부가 갑자기 이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섰을 때, 아무도 쉽게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사 청산을 위해 애써온 위원회가 막판에 엉터리 위원장과 위원들 때문에 엉망으로 활동을 종료하게 됐다. 일부 간첩단 사건은 제대로 조사가 이뤄졌으나 나머지 사건은 조사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김영진 씨는 이들을 만나 자신이 조사관 시절 수집한 기록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재심을 하도록 안내하고 설득했다. 위원회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재심으로라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토대로 재심 신청
김정사 씨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근거로 2010년 1월8일 재심 신청을 했다. 1년 4개월만인 2011년 5월18일 첫재판이 시작됐다.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사건은 재심이 무난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건은 재심이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상황을 재판과정에서 본인이 모두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정사 씨 등은 재일한국인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복귀를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간첩 누명을 쓴 재일교포 160여명을 상대로 재심 신청을 돕고 있다.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의 재심 사건은 이 사건을 맡은 국내 5명의 변호사 역할이 컸다. 이석태, 심재환, 조영삼, 장경욱, 이상희 변호사 등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그들이다. 특히 이석태 변호사는 짧은 기간에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재심 변호인단을 꾸려 이 재판을 주도했다.

재판부의 판결
2011년 9월23일 서울고법 형사8부는 김정사 씨와 유성삼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4년만이었다. 이어 지난 21일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고등법원 판사는 “보안사에 의한 영장 없는 구속과 고문, 이후 계속된 위협으로 이뤄진 김 씨 등의 자백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며 “김 씨가 일본에서 한민통 대표를 만났을 때 그가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증거도 없다”며 간첩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또 “긴급조치 9호는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한 유신헌법이나 현행헌법에 비춰볼 때 표현의 자유나 청원권을 제한해 위헌이므로, 이들의 긴급조치 위반 혐의도 무죄”라고 덧붙였다.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직접 사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일동포 간첩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던 한 재판부는 피고에게 “당시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에서 남북이 첨예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이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재판부가 법원과 국가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당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점에 대해 사법부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사과해 피고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대법원 1부는 국가보안법 및 긴급조치 9호 위반, 간첩활동 등으로 기소된 김 씨와 유 씨에 대한 재심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재일동포 간첩 사건
1970년대와 80년대 간첩으로 몰려 유죄를 받은 사람은 얼추 160명에 이른다. 이중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가 확정된 사람은 채 10명에 못 미친다. 아직도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일부 변호사들이 힘을 쓰고 있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명백히 간첩단 사건은 조작이라고 재심 권고가 이뤄지고도 재판은 난항을 겪고 있다.
우리는 일본을 향해 과거사를 사죄하라고 목청을 돋운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군사독재시절 벌어진 갖은 고문과 고초, 조작된 사건이 아직도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박영록 전 국회의원의 경우도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불법적인 재산강탈로 정부가 해결 권고를 내렸지만 국방부도, 안전행정부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재심 판결을 통해 소송을 전개하는 일도 돈과 비용이 드는 일이어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잘못된 과거사를 조속히 바로잡아야 진정한 대국민통합이 이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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