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 종말처리장은 필요하지만 내 고장에 짓는 건 안 돼!”
“30km 용인 땅 내주고 I.C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돼!”
“100만 용인시민의 힐링 공간 용인 자연휴양림”

[경기 위클리오늘=류봉정 기자] 이건영 전 용인시의원 아내는 그를 한 마디로 ‘바보 이건영’이라고 말한다. “다른 의원들은 동네 가로등 설치 같은 조그마한 민원을 해결해 주고 칭찬받는데 뭐가 잘나서 국회의원이나 시장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다니면서 욕은 욕대로 먹느냐”고 말하지만, 그 속엔 남편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다.

▲'경안천에서 경강선까지' 저자 이건영 전 용인시의원.
▲'경안천에서 경강선까지' 저자 이건영 전 용인시의원.

이 전 의원은 여유롭게 살아갈 중년의 시간 대부분을 ‘경안천 살리기’에 쏟아부었다. 그에 노력으로 경안천은 아름다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난해 12월 24일 그의 두 번째 책 ‘경안천에서 경강선까지’는 용인을 사랑하고 시민을 위한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쏟아부은 시의원의 힘겨운 이야기가 감동을 선사한다.

용인시의회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정치에 꿈을 품고 있던 사람이 아니다. 1990년 39살에 갈담 1리 마을 이장이 되면서 6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을 어떻게 하면 더 잘살게 할까? 고민한 시점에 ‘내가 살기 위해 경안천을 죽였다. 경안천을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경안천이 죽었다.

1998년 선배의 권유로 시의원에 당선된 뒤 예상치 못한 그의 인생 역경이 시작됐다. 용인시 대표로 팔당호 7개 시·군 수질정책협의회 공동대표로 일하게 되면서 수질과 종말처리장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물장구치며, 천렵도 즐길 수 있었던 맑고 깨끗한 경안천이 발을 담그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죽어갔다. 경안천 오염과 함께 이건영의 추억도 죽었다.

그는 “당시 모현은 마을 대부분이 축산업을 통해 밥은 먹을 수 있는 시절이 왔지만, 결국 환경이 파괴되고 그 안에서 나를 비롯한 마을 공동체가 환경에 재앙을 겪었다. 홍수로 인한 피해를 매해 겪는 상황은 끔찍했고, 경안천 물은 농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고 말한다.

■ ‘모현에 하수종말처리장을 짓는 일이 시급하다’

“하수 종말처리장은 필요하지만 내 고장에 짓는 건 안 돼!”

“눈을 떠 잠이 들 때까지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그때 나는 시의원인지? 환경부 직원인지 모를 만큼 환경부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장관· 차관을 만나 모현 하수종말처리장 외 11개 종말처리장 계획을 환경부에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현 종말처리장 신설은 광주처리장에서 처리하기로 전 장관이 이미 승인했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에 이 의원은 ‘용인의 미래를 위해 종말처리장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환경부를 찾아 끊임없이 설득을 한다.

결과는 2002년 4월 환경부에서 하수처리 기본계획에 모현 종말처리장 외 10개 종말처리장을 승인하고 죽전 종말처리장도 조건부 승인하기에 이른다. 기쁨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동네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평생 들어야 할 욕이란 욕을 다 먹게 된다.

“왜 일산리에 똥통을 갖다 놓느냐” “이건영 물러가라” “총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다” “밤길 조심해라...” 등 수 많은 욕설과 협박에 시달렸다. 주민을 위해 큰일을 했지만 결국 다음에 치러진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경안천에 설치된 자동보.
▲경안천에 설치된 자동보.

■ ‘경안천 살리기’ 본부장을 맡는다.

“2006년 10월 당시 김문수 경기지사에게서 ‘경안천 살리기’ 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받았다. 경안천을 살리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경안천의 문제점을 보고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모현읍 구간 자전거 도로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2010년 드디어 경기도에서 ‘고향의 강’ 모현 7km 구간 계획을 세웠다. 예산도 500억 원이 책정되어 완성하게 됐다. 특히 모현읍 부녀회원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시민이 경안천에서 자전거를 타며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가슴 벅차다.”

이 의원의 경안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년 홍수로 인해 침수 피해를 보던 농부들을 위한 자동보 설치를 제안하고 완료했다. 그 일로 홍수 피해를 막고 맑고 깨끗한 지금의 경안천의 모습으로 만들 수 있었다.

■‘휴양림’ 이런 시설을 몰랐다니.

그의 눈과 귀는 항상 용인시민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열려있다. 2002년 가평 휴양림을 처음 접한 그는 ‘왜? 이렇게 훌륭한 시설을 처음 알았을까?’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이건영은 마음이 바빠졌다.

“용인시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데 시민이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즉시 시장님과 시 의장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모두가 좋은 아이디어라며 ‘용인 자연휴양림’을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되어 추진했다.”

“2002년에 시작해 7년여 시간을 들여 ‘용인 자연휴양림’이 2009년에 문을 열게 됐다. 물론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내 지역에 유치하고자 하는 의원들도 다수 있었고, 그 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입지에 들어선 휴양림은 용인시민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인근에서 최고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휴양림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

▲용인다움학교.
▲용인다움학교.

■교육에 목을 매다.

이건영 전 위원은 ‘학교’라는 말에는 움츠러든다. 그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다. 의원 시절 대학을 가라는 주변의 권유에 아내의 일침이다. “여보, 그냥 살아” “대학을 갈 거면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대학에 가라”는 말에 그는 복잡했던 학교에 관한 생각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교육에 목을 매는 이유는 교육의 중요함을 절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용인시에 거주하는 장애인 학생은 2천 500여 명인데 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는 기흥구에 사립학교 한곳이 유일했다. 이곳도 150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인근 시로 왕복 4시간 거리를 다닌다는 말을 듣고 용인에 장애인학교를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2001년 ‘용인시장애인학교 추진위원장’을 맞으며 전국에 장애인학교를 대부분 방문해 실정과 운영을 배워나가며 준비했다. 하지만 준비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에 마주하게 된다. 바로 지역주민의 반대가 그것이다. 그가 지쳐갈 즈음 ‘서울 서진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임을 받아들이고 결국, 2021년 3월에 ‘용인다움학교’가 개교를 하기에 이른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여러 후보지 중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주민의 반대에 막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유림동 955번지 토지 소유주께서 흔쾌히 부지 사용 승낙을 해 주셨다. 이에 더해 지역주민의 많은 도움으로 개교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용인의 인재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용인에서 키워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용인 한국 외국어대학교 부설고등학교(용인외고)’를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교시키게 된다. 용인에 생긴 특수목적고등학교인 용인외고다.

그는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용인에 명문고를 설립하는 일이니 모두가 쌍수 들고 환영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주민이 아닌 일부 동료 의원들. 구체적인 예산이 거론되기 시작하자 각 학교에 20억씩 나눠주자는 터무니없는 말들이 나돌았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2005년 3월 드디어 용인에도 외국어고등학교가 생겼다. 개교를 앞두고 며칠을 잠을 설칠 정도로 마음이 설렜다. 개교당일 반대했던 시의원들도 축사하기 위해 참석했다.

“축사하러 왔어? 그렇게 반대하더니...”

“에이, 형님...”

극렬하게 반대하던 모습이 떠올라 기쁘면서도 속 좁은 뒤끝을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한 장면이다.”

■30km 땅을 내주고 용인에는 I.C가 없다고?

“2000년도 세종~포천 간 제2경부고속도로 계획을 듣고 ‘용인이 발전할 기회다’라는 생각을 했다. 2009년 드디어 고대하던 설계가 나왔다. 그 발표를 보고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30km에 달하는 땅을 제공하고도 I.C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용인은 땅만 내주고... 등신마냥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시장, 국회의원, 시의원 그리고 주민께 호소했다. ‘용인에 다시 없을 기회라면서 I.C 존치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시민의 적극 참여 덕에 2만 5천여 명에 달하는 서명과 청원서를 국토부에 전달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진행된 시민참여 서명운동이었다. 그 결과 2018년 8월에 모현과 원삼에 I.C를 존치한다는 결정 소식이 날아들었다. 근 20여 년 만에 이룬 쾌거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나비효과란 이런 것일까? 원삼에 I.C 존치가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유치가 확정됐다. SK가 120조 원을 투자하고 각종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업체가 들어서 용인 아니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 메카로 거듭나는 결실을 이룬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건영 전 의원의 이야기에서 시의원의 역할이 이렇게 큰 것인지 다시금 알게 된다.

그는 시의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째, 조례를 제정·개정하거나 폐지한다. 둘째, 예산과 기금을 심의해 확정하고 결산을 승인한다. 셋째, 시를 대상으로 행정사무 감사를 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시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원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행사만 쫓아다니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주민을 위해 끊임없이 일을 찾아 실행에 옮기는 의원이 있다”고 말한다.

이 전 의원은 세 번의 시의원을 지내며 용인을 위한 국비와 도비 예산 2천여억 원에 을 따냈다. 전국 기초의원 중 유일무이한 일이다.

그는 아내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남은 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경강선’ 확정을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기자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시의원들의 5분 발언과 시정질의는 의원들이 하는 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척도다. 실천한 결과를 언론에서 다뤄달라.”

▲이건영 전 의원과 아내 이내옥 씨가 반찬나눔 봉사를 위해 김치를 담그고 있다.
▲이건영 전 의원과 아내 이내옥 씨가 반찬나눔 봉사를 위해 김치를 담그고 있다.

2010년 그는 ‘야단치는 아내 야단맞는 남편의 행복이야기’에서 아내 이내옥 씨와 숱한 역경을 헤치며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다운 첫 책을 출간했다. 그가 평범한 농사꾼에서 시의원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두 번째 책 ‘경안천에서 경강선까지’(이건영 지음 / 용인시민신문사)는 발품 팔며 시민을 돌보는 기초의원의 생생한 삶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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