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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호 칼럼] 김광석과 이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싶다
   
 

[위클리오늘=임종호 기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흔히 가수는 자신의 노랫말처럼 인생을 산다고 한다.

‘서른 즈음에’를 노래한 김광석이 그런 사람이다.

그 전에 트로트가수 배호(본명 배신웅)도 그랬다. 배호는 1971년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떠났다. 인기 절정이던 스물아홉의 나이에. 배호가 저 세상으로 떠나자 요절 가수 신드롬이 일었다.

‘4월과5월’이라는 듀오로 활동하다 솔로로 전향한 김정호(본명 조용호)도 다름 아니다. 그는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랫말처럼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에게 ‘서러워 말라’는 말을 남기고. 창창한 나이 서른셋에 그를 쓰러뜨린 건 지금은 중병으로 여기지도 않는 폐결핵이었다.

김광석은 서른셋의 푸르디 푸른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을 떠나지 못했다. 잔잔한 노랫말은 들을 때마다 가슴을 쳤다.

최근에 <영화 김광석>이 개봉됐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다.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차마 스크린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당시 기자는 경찰서를 중심으로 사건사고를 기사화하는 이른바 사건기자를 잠시동안 담당했다. 김광석이 유명을 달리한 1996년에는 마포라인을 가끔씩 돌곤했다. 통상 사건기자들은 서울시내 31개 경찰서를 7~8개 라인으로 나눠 담당한다. 

마포라인은 마포-서대문-서부-은평경찰서 관할을 마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이 라인은 연세대와 이화여대, 서강대, 명지대, 홍익대 등 대학들이 밀집해 있어 대학라인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사건이 타전되던 1996년 1월 6일 이른 아침을 기자는 눈이 소복이 내리고 날씨가 몹시도 추웠던 날로 기억한다. 기자는 그날도 손을 비비며 버릇처럼 기자실이 있던 마포경찰서 형사과 철문을 열고 들어섰다. 

새벽에 먼저 출근해 사건기록을 뒤지던 석간신문 기자는 이내 흥분된 어조로 가수 김광석이 숨진 채 발견됐다며 기사를 전화로 송고하고 있었다. 이미 47일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스위스그랜드(지금의 힐튼그랜드)호텔 장기투숙자 객실에서 유명가수 듀스의 김성재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터라 이내 기자실은 술렁거렸다.

마포경찰서와 김광석이 숨진 채 발견된 자택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전날 눈이 채 녹지 않은 상태인데다 영하의 날씨로 도로가 얼어붙어 승용차는 쉽사리 달릴 수가 없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김광석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경찰복장을 한 의경 서너명이 ‘수사중 접근금지 ’라는 표지를 내걸고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의경들이 길을 내주지 않아 집안까지는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현장검증을 하고 나오는 경찰관에게 귀동냥으로 몇 가지를 확인했다. 이날 김광석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는 것과 전날 SBS공개홀에서 ‘겨울나기’공연 녹화를 했다는 등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 서모씨가 새벽에 들어 온 김광석을 확인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 숨져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경찰 조서를 통해 당시 집안에는 부인 서씨와 서씨의 오빠이자 김광석의 처남이 함께 있었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광석의 사건은 현장에 있었던 부인 서씨의 주장처럼 큰 논란이 없이 자살로 종결됐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는 다음날 모든 조간신문에 ‘인기가수 김광석 자살’이라는 큰 제목을 달고 실렸다.

그가 숨진지 3일 후 신촌세브란병원 영안실에서는 장례식이 열렸다. 가요계 선후배들과 애도하는 수백명의 팬들이 몰려들었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장례식 내용도 사진을 포함한 기사가 전해졌다.

20년이 넘는 지금도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자이기 전에 그의 노래를 애창하는 팬이었기에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김광석의 자살은 많은 의문점이 남는 사건이었다. 기자실에서 김광석의 자살 원인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 기자는 물론 그 누구도 김광석의 죽음을 목격한 서씨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씨의 오빠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서씨와 어떤 관계인지도 묻지 않았다. 더욱이 김광석이 숨진 날은 부인 서씨와 이혼하기로 한 날이었다는 사실도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물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슬픔에 빠져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부인 서씨에게 섣불리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듣기 싫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어야하는데 하는 자괴감이 든다. 이때문인가? 기자는 김광석에게 부채의식 같은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영화 김광석>을 만든 이상호 기자는 우리를 대신해 김광석의 죽음과 관계된 수많은 의혹에 대해 되묻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기자는 지금도 그의 애잔한 노래를 CD에 담아 놓고 가끔 승용차에서 듣곤 한다.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른 즈음에’는 지난 2007년, 음악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됐다. 그리고 7년 뒤인 2014년엔 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장이 추서됐다.

김광석은 이 노래를 발표하고 나서 한동안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노래 가사를 생이 닮아 갈까봐서’였을까. 일생을 매일 이별하며 살게 될까 걱정했던 김광석은 그렇게 우리와 매일매일 이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뒤늦게 알려진 딸 서연양의 사망사건을 다시 수사한다고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의혹에 쌓여있는 김광석의 사망사건도 다시금 다뤄지길 기대한다.

사랑하는 가객 김광석을 이제는 놓아줘야 하기때문이다.

임종호 기자  ceo@oNe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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