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세계의명화 '남아있는 나날' 4월 21일(토) 밤 10시 55분 

남아있는 나날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출연: 안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제임스 폭스/제작: 1993년 영국, 미국/러닝타임: 138분/나이등급: 15세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의 암운이 드리우던 1930년대, 영국 옥스퍼드의 대저택 달링턴 홀에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전 세계 유력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달링턴 홀의 집사장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 분)는 오랜 경험과 타고난 치밀함으로 이 대대적인 행사들을 매번 빈틈없이 치러낸다. 

달링턴 경을 절대적인 주인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하는 스티븐스는 아랫사람들의 기강 확립과 효율적인 집안 관리를 위해 추호도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발병이 난 외교 사절을 접대하는 침착함을 보이는 스티븐스, 이토록 차갑기만 한 스티븐스 앞에 어느 날 매력적인 하녀장 켄턴(엠마 톰슨 분)이 나타난다. 

켄턴은 스티븐스의 냉정한 태도 이면에 따스한 인간미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낀다. 스티븐스 역시 똑똑하고 유능한 켄턴에게 끌리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빗장을 더 굳게 걸어 잠근다. 결국 스티븐스의 이중적인 태도에 지친 켄턴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영국 서부로 떠나버리고,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나치 부역자로 낙인찍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국인 부호 루이스 전 의원을 새 주인으로 모시게 된 스티븐스는 모처럼의 휴가를 얻어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며 켄턴이 사는 서부의 클리브던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후 노년의 모습으로 어색하게 마주한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 가슴속에 담아둔 애틋한 감정을 풀지 못한 채 각자의 일상을 향해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193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 중인 영국의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스티븐스라는 한 영국인 집사의 투철한 직업관과 충성심, 절제, 헌신, 그리고 하녀장 켄턴과의 애틋한 사랑을 묵직하고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낸 서사 드라마다. 거대한 저택과 함께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정상급 연기자들의 열연, 그리고 2차 대전에 휘말리는 격동기 유럽의 시대상과 극적인 국제 관계가 배경으로 펼쳐지며 스토리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지난날의 온갖 영욕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남은 달링턴 홀은 어쩌면 스티븐스와 그의 조국 영국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영화는 영국인들이 오늘날까지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전통과 예절, 품위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일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石 一雄]의 소설을 영화화한 <남아있는 나날>은 영국 출신의 연기파 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하워즈 엔드(1992)>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이후 다시 뭉쳐 절정의 연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1993년 전미 평론가 협회상, LA 비평가 협회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런던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캔자스시티 영화 비평가 협회는 남우주연상과 여주주연상을 동시에 수여했다. 

<남아있는 나날>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1928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USC를 졸업한 후 베니스, 뉴욕, 인도에서 수년간 다큐멘터리를 연출했으며 인도 출신의 제작자 이스마엘 머천트와 힘을 합해 <셰익스피어 사람>(1965)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끌었다. 

<구루>(1969), <봄베이 토키>(1970) 등을 통해 이국의 문화를 조망했던 아이보리는 1975년 머천트와 재회해 제작사를 설립하고 오늘날 유명해진 ‘머천트 아이보리’ 제작사의 개성을 확립시키는 고급영화들을 꾸준히 제작했다. 이들은 300만 달러가 넘지 않는 중간 규모의 품격 있는 사극영화를 주로 제작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전망 좋은 방>(1985), <모리스>(1987), <하워즈 엔드>(1992) 등 주로 EM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 과거 영국 귀족사회의 모습을 담은 아이보리의 영화들은 대부분 이상주의와 강박관념, 그리고 계급적인 위치에 따른 위선을 단아한 형식으로 묘사했다. 

그들의 영화 가운데 최고작은 일본계 영국인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남아있는 나날>(1993)이며 이 영화에서 아이보리는 시대의 모순과 개인의 갈등이라는 고전적인 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비통한 슬픔을 전해준다. 아이보리의 후기작들은 주로 영국 귀족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왔으며 서정적인 동시에 내면적이고 사실주의적 정확함을 지닌 고전적이고 단아한 형식미의 정수를 보여줬다. 이후 <대통령의 연인들>(1995), <프렌치 아메리칸>(2003)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작으로 (200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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