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그후 15년 '한국 경제 이정표' 해부

 

1997년 말 대선을 앞두고 닥친 외환위기는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외환위기의 시작은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극비리 방한이었다. 사흘 뒤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경질됐다. 국가부도사태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한국경제)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장담하던 그였다. 임창렬 부총리가 그 자리에 앉고 이틀 뒤인 1997년 11월 21일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IMF 경제신탁통치’의 시작이었다. 체력이 약한 기업은 줄줄이 쓰러지고 수많은 가계가 파탄 났다.

그렇게 국가부도 사태를 맞고 15년이 흘렀다. 그 새 한국은 빠르게 수렁에서 벗어나 다시 내달렸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을 한데로 모아 위기를 극복했으며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는 다시 무럭무럭 성장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랬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고 외화보유액은 16배로 불어났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굴지의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해가며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했다. 

1997년 대선이 그랬듯 이번 대선도 경제위기의 복판에서 치러진다. 누가 되든 힘든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차기 정부 앞엔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분배 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난제가 놓여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든, 무소속 안철수 후보든 위기를 한 방에 뚝딱 해결할 ‘도깨비 방망이’는 갖고 있지 않다. ‘과도한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은 이미 이명박 정부 ‘학습효과’를 본 터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걸었던 기대는 물거품처럼 부서졌다. 경제 하나만큼은 잘 할 것이란 다수의 믿음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국민은 배신의 상처를 안고 다시 투표장으로 향할 것이다. 누구를 뽑든 과도한 기대를 버린 채.

그럼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누구를 믿고 어디를 봐야 하는가. 우선 상당 기간 저성장을 견뎌낼 각오부터 해야 할 것이다. 미국, 유럽 재정위기는 단시일에 해결될 사태가 아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경제 역시 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서 양극화 심화, 고용의 질 악화, 부동산 거품과 같은 부작용이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외적 성장의 짙은 그늘

외환위기는 한국의 경제구조 전반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대기업은 ‘차입경영’의 구태를 벗고 부채비율을 대폭 낮췄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고 외화 창고는 그득해졌다. 지난 10월 기준 외화보유액은 3234억 달러로 1997년 204억 달러에 비해 16배로 늘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지표들이 너무 많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예측한 올해 잠재성장률 추정치는 3.7%다. 1991~2000년 잠재성장률 6.1%의 절반 수준이다. 실질성장률은 올해 2.4%로 예상되며 내년에도 3%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신석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인구구조 변화로 취업자 증가세가 둔화하고 투자도 보수적으로 돌아서 잠재성장률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한복판이던 1998년 7.0%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올해 1~10월 평균 3.3%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20~29세 청년 실업률은 7.6%로 2000년 초반과 비슷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계수는 시장소득 기준 1997년 0.264에서 2011년 0.313으로 올랐다. 지니계수는 0에서 1 사이 값을 가지며 수치가 높을수록 불평등도가 높다는 의미다. 

서민들은 먹는 것조차 더 힘들어졌다. 11년여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엥겔지수가 말해준다. 엥겔지수란 가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이 지수가 높다는 것은 가계의 생활 형편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다. 후진국일수록 엥겔지수가 높다. 한국은행 국민계정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가계의 명목 소비지출은 323조 9000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4.7% 늘었다. 같은 기간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지출은 44조 원으로 6.3% 늘었다. 계산하면 엥겔지수는 13.6%다. 2000년 하반기 14.0% 이후 최고치다. 엥겔지수는 1970~1980년대 30~40%를 넘나들다 1990년대 중반 이후 20% 아래로 낮아졌으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전후 오름세로 돌아섰다. 2008년 상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4년 6개월간 오름세였다. 

증시도 부진하다. 올해 한국 증시는 아시아 국가 중 최하위권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9일까지 한국 증시의 수익률은 3.5%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기준 49개국 가운데 31위를 기록했다. 주변국인 홍콩(19.7%)은 9위, 중국(9.3%)은 23위, 일본(5.0%)은 30위로 한국보다 수익률이 앞섰다. 

내년 이후 한국경제 어디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성장률은 ‘V자’로 반등했다. 세계 경제 호황 덕분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세계 경제 상황 자체가 다르다. 세계 경제를 이끌던 미국과 유럽이 수렁에 빠져 있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계속 풀면서 위기를 모면하고 있을 뿐 근본적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있다. 남유럽 ‘불량국가’들에 발목 잡힌 유럽도 연쇄 부실의 공포에서 헤매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V자 반등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L자형 저성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대내외 악재로 저성장 기조가 몇 년은 더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돈의 흐름을 보면 저성장 기조가 확연하다. 저금리에도 돈은 돌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올해 7월과 10월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내려 시장에 돈을 풀었다. 그 결과 기준금리는 6월 3.25%에서 10월 2.75%로 0.50%포인트 낮아졌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 12월 30일 27.15%까지 올라갔던 콜금리는 이달 16일 2.75%로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저금리 약발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저금리에도 투자, 소비 모두 부진한 모습이다. 유동성이 풍부해도 기업이 투자를 꺼리는 것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계 소비가 늘지 않는 것은 돈이 빚 갚는 데 쓰이는 탓이다. 자영업자를 포함해 1000조 원을 넘어선 가계빚은 그 만큼 가계를 짓누르고 내수를 위축시키는 지경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통화정책 효과는 6개월쯤 지나야 알 수 있는데 경기침체로 현재 투자와 소비 진작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로 먹고 사는 경제인데 수출 환경도 비관적이다. 대한민국 제품을 사줄 세계 시장은 깊은 침체에 빠졌고 환율도 우호적이지 않다. 원·달러 환율은 하락 중이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宋鴻兵)의 전망으로는 달러가치는 장기적으로 대세하락이다. 그는 최근 방한해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의 약발이 다하면 ‘달러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수출채산성이 떨어지는 흐름인 것이다. 삼성전자 등 제품경쟁력을 갖춘 대기업들은 환율 하락에 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으나 중소기업의 경우는 민감한 문제다. 가와이 마사히로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 소장은 최근 방한해 “내년 한국은 수출 부진으로 경제성장이 위축되고 높은 가계부채와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때문에 경기가 더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경제 전망은 음울하다. 장기간의 침체를 각오해야 할 판이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은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4%보다 낮은 불황을 4∼5년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최근 국내외 경기를 위축시킨 원인 요소들은 단기간에 해소되거나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라며 “이번 불황은 이제까지의 경기변동에서 경험하지 못한 장기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년도 경제성장률도 올해와 비슷한 수준인 2.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해법은 결국 원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상당 기간 지속될 저성장 국면을 벗어나려면 생산성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과 내수 모두 성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서비스업이나 중소기업 부문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서비스산업의 수출산업화’, ‘중소기업의 글로벌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올바른 거시경제정책을 선택할 기로에 서 있다. 가계부채 관리와 인구구조 변화의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과제다.” 가와이 소장의 조언도 경청할 만하다. 충고, 조언, 해법 제시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침체를 벗어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이다. 한국경제 위기를 한 방에 해결할 ‘도깨비 방망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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