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후보의 사퇴이후 대선판의 돌아가는 양상을 절묘하게 상징하는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한용운의 ‘임의 침묵’) 맞다. 안철수를 향해 박근혜·문재인 캠프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적 ‘사랑의 노래’가 지금 ‘안철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꼴이다. 일부 언론은 그 사랑노래를 일러 ‘안(安)비어천가’로 명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 후보 측은 안철수의 쇄신안을 적극 보완, 정치쇄신안에 반영하겠다고 공표했고 문 후보측은 최상의 수사를 동원해 ‘안심’(安心) 잡기에 안간힘이다. 두 진영으로서는 안철수 지지자 끌어들이기를 역점전략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해준다.

안철수 현상의 위력은 어디까지 일까. 분명한 것은, 침묵하는 안철수가 앞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그에 대한 지지자들의 이동분포가 결정되고 대선의 막바지 판도 역시 그에 따라 가름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안철수는 과연 다시 대선판에 등장할까. 단일화 협상과정에서, 대권을 향한 정치판이 피바람 몰아치는 황야의 결투장임을 실감했을 그가 선거법의 벽을 뚫고 ‘돌아온 장고’의 역할을 자임(自任)할까. 대선판에 등판한다면 문재인 편에 서서 박근혜를 향해 지원사격을 하게 될까. 아니면 멀리서 결투를 관망할 것인가. 국민의 관심은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다.

앞서 안철수 퇴장 회견장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뒷면의 대형 현수막에 그의 사진과 함께 큰 글씨로 쓰인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신문 사진을 통해 그것을 접하면서 두 달 전 그가 읽은 대선출마 선언문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안철수와 그 진용을 위한 미래는 오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아니 안철수가 그 미래를 잡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가 그토록 주창했던 새 정치를 위해 대선판에 끝까지 남았다면 미래는 그와 그 진용의 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철수는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퇴진 자리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국민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욕망의 좌절로 인한 슬픔의 표출이었을까.

그는 떠나면서 ‘백의종군’하겠다고 했다. 무엇을 위한 백의종군인가. 그의 백의종군 다짐이 충무공 이순신의 그것처럼 순국(殉國)도 각오한 충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참으로 냉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그가 향후 정치적 입지의 유·불리 계산으로 어느 편에 서서 황야의 결투에 합세할 경우 어떻게 될까. 지금 안철수 진영에서 나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통해 이를 전망해 볼 수 있겠다.

국민을 외치면서 ‘국민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자책과 함께 단일화의 프레임에 함몰되어 국민후보 아닌 야권후보론을 앞세운 게 최대 실책이라는 것이 안철수 진영 전략가들의 분석이라는 보도다. 이미 그 실책의 회복을 위한 시운(時運)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원인분석으로서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이 어디있는지도 몰랐다는 안철수라면 이제 겸허하게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새 정치· 진심· 국민의 뜻 등 그 현란한 수사(修辭)부터 발설을 삼가 해야 한다. 대선판에서 안철수 현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구자체를 버려야 한다.

안철수를 정치적 ‘혜성’으로 만들어 준 것은 ‘청춘 콘서트’였다. 그는 시대 상황 때문에 좌절감에 빠진 젊은 세대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환상의 주입이나 다름없다. 먼저 이를 참회해야 한다.

참회의 가시화를 위해 새로 청춘 콘서트를 시작하면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대권 꿈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젊은이들에게 진솔하게 설명하면 좋을 듯싶다. 정치적으로 미성숙이었고 경륜으로서 역부족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래야만 국민들이 안철수의 ‘진심’과 ‘아픔’을 믿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