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 타결 직후 민관 회의서 일제 발표···행후 5년간 집중 투자
"제조·AI 인프라 한국에 둔다”···실제 집행·지역균형·중소 협력사 파급이 관건
기다렸던 한·미 관세 타결 소식에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이 향후 5년간 국내에서 약 800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4대그룹은 어제(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이같이 밝혔다. 삼성 450조원, 현대차그룹 125조2000억원, SK 128조원, LG 100조원 등이다. 모두 합치면 803조2000억원 규모다.
이날 회의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4대 그룹은 관세 불확실성이 완화된 시점에 국내 투자 확대를 공식화하며 “생산기지와 핵심 연구·개발은 한국에 두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 삼성 450조···평택 5공장 재개로 반도체·AI 대응
삼성은 향후 5년간 연구개발(R&D)을 포함해 국내에 450조원을 투자한다. 2022년 발표 때는 5년 450조 가운데 국내 360조원을 배정했지만, 이번에는 전액을 국내에 투입하겠다고 못박았다.
핵심은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캠퍼스 2단지에 5공장(P5) 건설을 다시 추진, 오는 2028년 본격 가동을 목표로 한다. 글로벌 AI 확산으로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초대형 메모리·시스템반도체 생산거점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삼성은 수도권 외 지역에 인공지능 데이터센터·국가 연산센터 등을 구축하고 이차전지·디스플레이·가전 등 계열사 생산시설 투자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 비수도권 투자를 늘리고, 협력사 상생펀드·ESG 펀드 확대 등 간접 지원도 포함됐다.
■ 현대차그룹 125조2천억···전동화·소프트웨어 중심車·수소에 집중
현대차그룹은 내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국내에 125조2000억원을 투자한다. 직전 5년(2019~2023년) 국내 투자액 89조1000억원보다 36조1000억원 늘어난 규모로, 연평균 25조원이 넘는다.
투자 방향은 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인공지능·로봇, 수소경제로 요약된다.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국내를 전기차·수소차 생산의 ‘마더 공장’이자 소프트웨어·자율주행 기술 개발 거점으로 삼고, 2030년까지 전동화 차량 생산·수출 비중을 대폭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그룹은 울산 연료전지·수전해 설비, 로봇 생산라인, 중소 협력사 위탁생산 체계 구축 등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관세 부담을 안게 된 1차 협력사의 대미(對美) 관세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방식의 상생 지원도 언급해, 투자와 동반성장을 묶은 ‘패키지’ 성격을 부각했다.
■ SK 128조···용인 클러스터만 최대 600조 “AI 3대 강국 비전 동참”
SK그룹은 오는 2028년까지 국내에 128조원을 투자하겠다고 재확인했다.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 팹을 짓는 속도에 따라 투자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만 놓고 봐도 장기적으로 약 600조원 수준까지 투자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SK는 인공지능·반도체·에너지·바이오를 중심으로 투자에 집중한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 메모리 수요와 공정 첨단화에 맞춰 초대형 팹 4기를 순차적으로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그룹은 시장 상황에 따라 증설 속도는 조절하되, 용인 클러스터 내 4개 팹 구축 자체는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도 대폭 확대한다. SK는 현재 매년 8000명 이상을 채용하고 있으며 반도체 팹 가동이 늘어날 경우 연간 1만4000에서 2만명까지 고용 효과가 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LG 100조···“60%를 소부장에” 국내 공급망 강화
LG는 향후 5년간 국내에 100조원을 투자하고, 이 가운데 60%인 60조원을 소재·부품·장비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투자 대상은 배터리·배터리 소재, 전장부품, 차세대 디스플레이, 인공지능·데이터센터, 친환경 기술 등이다. 구광모 회장은 “AI 시대에는 소부장 경쟁력이 곧 산업 경쟁력”이라며 “핵심 소재와 부품을 국내에서 개발·생산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LG는 2022년에도 2026년까지 국내 106조 투자·5만명 직접 채용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번 100조 투자 계획은 그 연장선에서 투자 방향을 소부장과 AI 인프라로 더 선명하게 좁힌 셈이다.
■ 관세 협상 이후 ‘투자–정책’ 빅딜···검증 기준은?
4대 그룹의 ‘국내 800조 투자’ 약속은 한·미 관세협상 타결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 시장에서 관세 우대와 공급망 안정을 얻는 대신, 국내 일자리와 생산기지 유지를 약속하는 '정치·경제 빅딜'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이런 초대형 투자 계획은 과거에도 반복돼왔다. 2022년 삼성은 5년 450조(국내 360조), SK는 2026년까지 247조, LG는 2026년까지 국내 106조,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63조 국내 투자 계획을 각각 발표했다.
이번 800조 투자 역시 실제 연간 설비투자·R&D 집행액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수도권과 지방·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파급효과가 어떻게 배분되는지, 관세·보조금 중심의 대외 의존도가 더 심해지지 않는지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
특히 반도체·전기차·배터리·소부장에 투자가 집중되는 만큼, 관련 인력 양성과 교통·전력·용수·주거 등 지역 인프라에 대한 국가·지방재정의 뒷받침이 뒤따르지 않으면 “공장은 지방에, 삶은 수도권에”라는 기존 불균형이 되풀이될 가능성도 크다.
업계 한 관계자는 "4대 그룹의 이번 발표는 숫자만 보면 역대급"이라면서도 "이제 ‘얼마를 약속했느냐’보다 ‘어디에, 어떤 속도로 집행하느냐’를 따지는 단계다. 관세 리스크 해결 이후 다시 짜이는 한국 제조업 지도가 실제로 바뀌는지, 향후 집행 내역이 그 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